「동양정신」 꿋꿋이 화폭에 담아|고 이응로 화백의 예술세계를 말한다.(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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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고암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늘그막에 주변친구들이 하나둘세상을 버리고 가되 『아, 그분마저…』하는 생각이 새삼스러웠기 때문이다. 더우기 고암은 연부력강, 나이가 들수록 젊음이 더해가는 분이라고 여기고 있었기에 그처럼 허망하게 이승을 뜰 줄은 정말 몰랐다.
고암과 내가 친교를 맺기는 일제치하 1920년대 초부터다. 나는 이당김은호선생 문하에 들어가 북화를 공부하고 있었고 고암은 해강김규진선생 밑에서 수묵문인화를 배우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9세나 연상이었지만 함께 선전에 임선된 후로는 서로 허교가 되어 종내는 『이놈, 저놈』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됐다.
고암의 성격은 매우 개방적이고 소탈했다. 매사에 거리끼는 법이 없었다. 또 어찌나 부지런한지 잠시도 손을 놀리질 않았다.
한때 고암은 남산기슭에서 나와 이웃해 산 적이 있다. 그는 새벽 산책을 무척 즐겼는데 날도 새기 전 깜깜한 꼭두새벽부터 달려와서는 곤히 잠들어있는 우리 부부를 두들겨 깨우곤 했다.
단잠을 뺐기는 게 억울해서 불평을 많이 했지만 나나 아내나 그의 부지런함에는 내심 혀를 내두르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는 성격이 소탈·호방하면서도 대쪽같이 매서운 일면도 아울러 갖고 있었다. 불의를 보면 참질 못했다.
국전이 썩였다고 매양 비분강개하던 고암에게 언젠가 정부에서 추천 작가 타이틀을 준 적이 있다.
고암은 이것을 자기인격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한달음에 국전 주관부처인 문교부로 달려가 『이놈들, 날 뭘로 보고 이따위 짓이냐』고 대갈일성, 직원들에게 의자를 집어던지며 한바탕 소란을 피운 이야기는 유명하다,
요임금이 제위를 물려주겠다고 하자 받지 않고 도리어 더러운 말을 들었다 하여 영천가에서 귀를 씻었다는 허유의 고사를 생각하게 하는 일화가 아닌가.
갑년을 훨씬 넘긴 그의 화력을 더듬어 볼 때 작품세계에 적잖은 변화는 있었으되 고암은 한번도 근본으로서의 동양정신을 방기한 일이 없었다. 『동양예술을 서양에 심기 위해서』라는 게 도불에 앞선 그의 변이었거니와 떠나면서 내 손을 잡고 『난 파리에 싸우러 가네. 자네도 뒤따라와 우리 함께 싸우세』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는 끊임없는 작품활동을 통해 자기의 뜻을 아름답게 수놓고 간 행복한 사람이다.
고암은 67년 동백림사건으로 3년 간 옥고를 치렀고 77년에는 또 백건우-윤정희부부 납치미수사건에 얽혀들어 심히 마음고생을 했다. 이런저런 사건을 들어 국내에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고 단언했던 그를 믿는다. 고암은 평생 거짓말을 모르고 산 사람이었거니와 그에게 이데올로기의 멍에를 씌우는 것처럼 당치않은 일도 없다는 게 지금껏 변함 없는 나의 생각이다.
그에게는 하나의 민족, 통일조국은 있었어도 좌니 우니 평을 가르는 편협한 이념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게 오고 싶어하던 고국 땅에 끝내 발을 들이지 못한 채 고암은 만리이역의 하늘아래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그걸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이참에 정부측이 해야할 일이 있다. 그동안 그에게 저질렀던 비례를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외에서 각고노력하여 국위를 선양한 공으로라도 그에게 응분의 대접을 해야한다. 절대로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김기창(한국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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