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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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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그날 저녁 베로니카는 일곱 시에 집을 나섰다. 그날 새벽에 7박8일간의 수감 생활이라 부를 만한 '마감'(어떤 이는 이 시간을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라 부르고 또 어떤 이는 '감옥 생활'이라 부르는데 베로니카는 후자였다)을 막 끝냈고, 그동안 못 다 잔 잠도 충분히 잔 상태였다. 베로니카는 이제 막 새로 태어난 듯 기분이 상쾌했다. 마침 바람이 그녀의 뺨을 기분 좋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당연히 이런 날에는 압구정동이든 홍대 앞이든 어디든 달려가 실컷 쇼핑을 해야 한다.

처음으로 '부인들의 행복을 따라'라는 이름의 파리 백화점에 간 드니스(에밀 졸라가 만든 지난 세기말의 젊은 시골 처녀)의 마음이 이랬을까.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상점 안에는 베로니카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감동시키고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물건이 언제나 수북이 쌓여 있고 베로니카는 매번 그것들에 꼼짝없이 사로잡힌다. 단번에 환희의 정원, 지상낙원에 도착한 듯 얼굴에는 생기가 넘친다. 그러곤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알고 있어. 이 모든 것이 다 허상이라는 것 말이야.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 걸. 쇼핑을 할 때면 너무 너무 기분이 좋은 걸…. 그뿐이야. 게다가 난 분별없는 여자가 아니니까 그리 많이 사지도 않을 거야. 꼭 필요한 몇 가지뿐이야."

하지만 기쁨은 그때뿐이다. 이것저것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몇 가지 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모든 게 이내 시들해진다. 어떤 때는 쇼핑 봉투를 집에 가져가기도 전에 분실하거나 또 어떤 때는 일주일(혹은 한 달) 넘게 쇼핑 봉투를 뜯어 보지도 않은 채 화장대 옆에 세워 둔다. 베로니카는 생각한다. 나는 왜 사지 않은 것들만 탐나는 듯 바라보고, 결국 그 가격을 지불한 것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이렇듯 심드렁하게 구는가. 그런 생각을 하자 베로니카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다 지겹게 느껴졌다.

그날 밤 베로니카는 밤 12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꿈속에서 저 멀리 미국까지 날아가 타샤 튜더 할머니를 만났다. 90세가 넘은 이 할머니는 미국 버몬트주의 농가에 살며 1000여 평의 정원을 가꾸고 직접 옷을 지어 입고 염소의 젖을 짜 치즈를 만드는 1830년대 방식의 삶을 사는 동화 작가로 유명한 분이었다. 베로니카는 언젠가 책 속에서 본 할머니의 아름다운 정원과 그 삶의 방식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동경해 왔던 터였다. 비록 꿈속에서였지만 튜더의 정원은 베로니카가 지금껏 본 세상의 어떤 지상낙원보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의심에 찬 목소리로 튜더에게 물었다. "정원 일의 순수한 기쁨에 대해서라면 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손질할 정원이 한 뼘도 없는 처지고 당신은 무려 1000평이나 되죠. 할머니가 행복하고 제가 불행한 건 혹시 바로 그 차이 때문이 아닌가요?" 90 나이에도 어딘지 소녀처럼 보이는 튜더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가씨, 내가 왜 아직도 동화책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나요? 그건 생활비를 마련하고 정원에 심은 꽃의 알뿌리를 더 많이 사기 위해서랍니다. 하지만 난 내 노동에, 내 소비에 평생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그게 아가씨와 나의 차이점이에요."

김경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