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솜씨로 역사를 파헤친 율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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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해마다 새롭게 돋아나는 시조의 가능성을 신춘문예를 통해 만나는 일은 참으로 기쁘다. 이 땅의 신인들이 모질게 갈고 닦은 시적기량을 마침내 터뜨리는 자리인 만큼 응모자 이상으로 선자의 기대도 부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응모작품의 전체적 수준으로 볼 때 시조의 앞날이 미쁘게 만은 보이지 않는다. 정형시로서의 시조가 그 정형으로 인해 시상 전개에 한계를 드러낸 작품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응모작품의 성향을 보면 대체로 세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전통적 서정을 묘사한 것, 둘은 현실적 삶에 뿌리를 박은 것, 셋은 역사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가진 것이 그것이다.
당선작 『남대문 앞에서』(김구부)는 시조의 운율에 익숙한 솜씨로 역사를 파헤치고 있다. 활달한 언어구사와 막힘이 없는 시상의 전개가 지은이의 시력에 믿음이 가게 한다.
고전적 어법이나 관념적 투어가 지적되고는 있으나 사물에의 외연성을 벗고 내포성을 살린 점은 높이 사 줄만 하다. 서사적 호흡을 가지고 있으며 메시지를 드러내지 않고 감성으로 감싸고 있음도 이 신인의 역량을 말해준다 하겠다.
마지막까지 당선권에 오른 작품으로는 『귀가』(이금란), 『허수아비의 언어』(지 한결), 『청해진』(이심순), 『풀잎 보기』(윤신) 등이 있었으나 상대평가의 자리인 만큼 무게와 깊이에서 밀려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심사위원 박재삼, 이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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