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修能 석차 공개가 차라리 낫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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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사회에서 사건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하는 문제처럼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회 현상 상호간에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어느 정도의 기간을 두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상관성의 정도에 대한 판단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 상호간의 관계를 밝히고, 특정 사회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은 중요하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라면 이를 시정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라면 이를 계속 유지하고 넓게 파급시킬 수 있는 방법을 확인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만약 원인에 대한 분석이 잘못되면 이에 기초한 대책이 무의미하거나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

*** 원인 분석 잘못하면 결과 꼬여

최근 신용카드 빚을 갚기 위해 부모나 형제 자매의 명의로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이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카드회사가 가입자 본인의 확인을 게을리 하고 있기 때문에 신용불량 등의 이유로 자신의 명의로 카드를 발급받을 수 없는 사람이 가족의 개인정보나 신분증 등을 이용해 가족 명의로 카드를 발급받아 이용하다가 그 대금을 갚지 못하고, 그 결과 명의를 도용당한 가족마저 신용불량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카드발급 실적이나 이윤을 위해 본인 확인을 게을리 하고 카드를 발급한 카드회사로 인해 가족 간의 애정과 신뢰, 그리고 가정 자체가 파괴되고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 것 같다.

카드 사용에 따른 신용불량자의 양산이 문제되는 현 시점에서 보도된 사례와 같은 경우 카드회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신용카드 회사로 인해 가정이 파괴된 것인가. 카드를 발급하면서 본인 확인만 제대로 한다면 이와 같은 문제가 해결되는가.

오히려 가족마저 신용불량자로 만들 수 있는 상황에서 가족의 명의를 도용해 카드를 발급 받을 정도까지 가족 간의 관계가 심각하게 악화됐음을 확인시켜주는 사례로 보아야 한다. 가족 명의를 도용한 카드발급 문제는 가족관계 파괴로 인해 발생한 부정적인 한 단면, 즉 결과다.

행정법원은 이달 초 수능시험 총점 기준 누적성적분포표와 개인별 석차를 공개하라는 판결을 했다. 교육인적자원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대학 서열화 방지' '점수 위주의 대학입시 지양'이라는 현행 대학 입시정책의 기본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대학수학능력시험 개인별 석차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 입장은 대학 서열화, 점수위주 대학입시라는 현상에 대한 원인을 잘못 분석한 것에 기인한 것이고, 수능 석차 비공개로 위와 같은 현상을 시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부당하다. 법원의 지적처럼 석차 비공개는 대입전형 방식의 폐단을 줄이고 대학 서열화를 방지하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수능 석차를 공개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수험생은 종전처럼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대학별 서열에 따라 좀더 높은 서열의 대학에 입학하고자 희망한다. 다만 석차가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자신의 석차를 '추정'하고 이에 기해 합격 가능성이 있는 대학 중 가장 '서열이 높은' 곳에 지원한다. 합격한 후 '추정'과는 달리 자신의 석차가 더 높아 더 높은 서열의 대학에 합격할 가능성이 있었음을 알게 되면 허탈해 하고 일부는 재도전을 선택하기도 한다.

*** 서열 높은 곳만 좇는 수험생들

대학은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 수능 점수 외에도 내신 등 여러 기준에 의해 학생들의 수학능력을 평가하고 있고, 새로운 평가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학생들의 입학 후 학업성취도의 분석 결과 등에 따르면, 현재로서는 수능 성적이 학생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가장 정확한 자료이고, 다른 다양한 평가기준이나 방법은 정착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학생과 사회의 대학에 대한 평가기준이 변화돼야 한다. 그러나 수능 성적 비공개로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수능 성적만으로 학생의 능력이나 가능성을 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가장 믿을 만한 기준을 사용할 수 없다면 평가가 잘못될 가능성이 커질 뿐이다.

조수정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