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단풍 빛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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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미당(未堂) 서정주의 시로, 송창식이 대중가요로 만들어 부르기도 했던 '푸르른 날' 이다. 화창한 날-초록의 상실-단풍으로 이어가며 가을의 모습을 노래한다. 묘하게도 이는 식물학자들이 설명하는 단풍 드는 이치와 똑같다.

단풍은 나무의 노화 현상이다. 겨울을 앞두고 밤이 길어져 광합성이 힘들어진 나뭇잎에선 엽록소가 사라지는 대신 붉고 노란 색소가 드러난다. 이런 생리 현상이 어떻게 생기는지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기후가 단풍 빛깔에 어떤 영향을 주며, 나무가 왜 매년 이를 반복하는지 등에 대해선 아직 궁금한 게 많다.

"단풍은 '일교차'라는 스트레스의 산물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나무일수록 빛깔이 산뜻하다." 미국의 한 유명 생리학자가 내놓은 연구 결과다. 따뜻하고 햇볕이 센 낮이 이어지면 아직 엽록소를 가진 잎은 광합성을 통해 에너지원인 당(糖)을 만들어 각 조직에 보낸다.

이때 밤 기온이 섭씨 10도를 밑돌면 당의 이동은 멈춘다. 이렇게 쌓이게 된 당이 붉은 색소(안토시안)로 바뀌어 단풍이 생겨난다. 청명한 낮과 쌀쌀한 밤이 반복될수록 잎은 선홍을 더한다.

평지보다 산, 음지보다 양지 바른 곳의 단풍이 더 곱다. 같은 숲에서는 햇볕을 많이 쬐는 가장자리가 안쪽보다 멋지게 물든다. 구름. 비. 바람은 단풍의 적(敵)이다. 흐린 날이 계속되면 당이 잘 만들어지지 않고, 강한 비와 바람은 색이 충분히 들기도 전에 잎을 떨어뜨린다.

일부 식물학자는 나무들이 진화 과정에서 나무껍질 속에 알을 낳아 월동시키려는 해충을 쫓아보내기 위해 단풍이라는 생리 현상을 고안해냈다고 설명한다. 붉거나 노란 잎으로 겁을 줘 접근을 막는 생존 전략이라는 것이다. 안토시안은 해충을 공격하는 화학물질로도 쉽게 바뀔 수 있다.

장마가 끝났는데도 흐리고 비 오는 날이 잦았다. 태풍 '매미'까지 국토를 휩쓸고 갔다. "올 가을 단풍 색깔은 낙제점이 될 것"이라는 기상청의 전망이 나왔다. 단풍이 곱지 못한 해는 보통 벼도 잘 자라지 않는다. 거무스레한 단풍에 일년 농사를 망친 농민들의 깊은 신음이 실려온다.'푸르른 날'이 많아지길 무척 기원하게 되는 2003년 9월의 가을이다.

이규연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