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교양] '당신의 저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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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인(45)씨도 남편 뒷바라지와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쫓아다니다 정작 자신의 젊음과 가능성은 접어둔 채 텅 빈 중년을 맞이하는, 이땅의 상당수 주부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뻔 했다.

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고 소설 쓰기에 관심이 많아 한동안 습작에 매달렸던 정씨는 완고한 부모님의 강권에 못이겨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면서 소설가의 꿈을 장롱 깊숙히 처박아두어야 했다. 30대 중반을 넘겨 다시 붓을 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느날 갑자기 "사는 게 아주 허전해지고, 그렇게 바라던 단란한 가정은 꾸렸지만 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씨는 부산소설가협회에서 운영하는 '소설학당'에 등록했고 10년 넘게 더께처럼 쌓인 문장(文章)의 녹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눈높이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초라한 작품을 앞에 두고 좌절과 결심을 반복하며 소설가 등용문을 꾸준히 두드렸지만 부담스러운 훈장처럼 낙방의 횟수만 늘어날 뿐이었다.

정씨는 소설 응모를 시작한지 5년 만인 2000년에야 문단 식구로 인정받았다. 단편 '당신의 저녁'으로 문예지 '21세기 문학' 신인상을 받은데 이어 역시 단편 '떠도는 섬'이 '한국소설' 신인상에 뽑혔다.

소설집 '당신의 저녁'은 두 작품을 포함, 정씨가 등단 이후 공들여온 단편 11편을 담았다.

11편의 소설은 대부분 문제적인 가족사를 공통분모로 출발한다. '푸른 그림자'의 주인공 준혁은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나는게 어떻겠느냐는 어머니의 권유를 받아들이지만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의 재혼 소식을 듣는다.

재혼에 걸리적거리는 아들을 먼 곳으로 보내려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새 아버지의 남동생 집에 얹혀 콩쥐같은 존재로 냉대를 받는 준혁은 자신의 방을 들락거리는 쥐새끼 일가족을 처치해야 하는 과제를 명령받고 실행에 옮기지만 '불안한 환경 속에서 살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쥐새끼와 동질감을 느낀다.

'당신의 저녁'은 매정하게도 사위의 사업자금을 빌려주지 않는 홀어머니와 갈등하던 딸 정선이 사망한 지 며칠이 지나도록 방치된 노인의 사연을 전하는 TV 뉴스를 보고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 어머니집을 찾아나서는 얘기다.

한달 넘게 어머니집에서 사람 사는 기척이 없었다는 주변의 얘기를 듣고 가슴이 철렁한 정선은 수소문 끝에 어머니가 집을 처분하고 들어 앉았다는 부산 근처의 양로원을 찾는다.

원망스럽기도 하고 어머니의 처지가 몹시 걱정스럽기도 한 정선은 양로원 사무장으로부터 어머니가 보증금 수혜자로 자신을 선정해 놓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죽으면 얼마간 남을 보증금을 어머니는 딸의 몫으로 돌려 놓았던 것이다.

편편마다 가슴 뭉클한 대목을 만나게 되는 게 정씨 작품을 읽는 즐거움이다. 반면 소설의 소재를 가족 주변으로 한정시켜 단조로운 점은 한계로 보인다.

정씨 스스로도 "이런 낡은 얘기가 요즘 어떤 효용이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고 밝혔다. 그런 회의는 첫 작품집을 내고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때문에 정씨는 다양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는 경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가야사(史)를 소재로 한 장편도 구상 중이다.

정씨는 늦깎이 소설가의 길을 "고통스러우면서도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삶을 호흡하는 기분이 든다"고 한다.

정씨는 수많은 늦깎이 작가 지망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자 '자아 찾기'에 목마른 아줌마들의 희망일까. 정씨는 품 넓고 속 깊은 굵직한 작가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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