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갈림길에 섰던 88년|이인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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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88년의 막이 내리고 있다. 얼마나 오랜 시일동안 얼마나 많은 기대를 걸고 기다렸던 한해 였던가. 얼마나 많은 흥분과 기쁨, 충격과 분노, 좌절과 비탄을 우리에게 안겨다 준 한해였던가. 희망과 불안이 아직도, 아니 점점 더 짙은 농도로 교차하면서 일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우리는 이제 또 하나의 새해를 맞이하려는 것이다.
1988년의 의미를 역사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아직 성급한 일 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의 고삐를 놓치지 않고 역사의 부평초가 되는 대신에 역사의 주체로서의 위상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지난해가 가져다준 체험의 의미를 바로 읽는 것이 결정적 중요성을 지닌다.
한마디로 말해 1988년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우리가 지니고있는 역사적 잠재력의 무한대성에 대한 새로운 일깨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숱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올림픽의 성공적 주최는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를 놀라게 했고 우리를 한낱 경멸과 비방의 대상으로 여겨왔던 소련이 우리를 자국의 개발사업에 끌어들이기 위해 갖은 추파를 던질 정도로 우리의 힘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기에 이른 것이다.

<교차하는 희망과 불안>
그러나 1988년은 또한 우리사회의 그늘진 굿이 얼마나 춥고 무서운 데인가 하는 사실도 이제 어느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생생한 현실로 부각시켰다. 고문을 당하다가 죽거나 불구가 되는 일이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우리 정치현실이었으며 소녀·가정주부 할 것 없이 대낮에도 여자들을 납치해 팔아 넘기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경제·도덕적 현실이다.
권력의 요술방망이만 휘두르면 몇 백 억도 쉽게 쏟아져 나올 정도로 우리의 경제는 살져있건만 농민들은 농산물의 생산원가라도 보상받기 위해 고추 더미를 끌고 와서 국회 앞에서 농성을 벌여야 하는 것이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올림픽의 88년은 그 동안 은폐돼 왔던 불균형 발전의 실상이 여지없이 우리 앞에, 그리고 세계 앞에 폭로된 해였던 것이며 우리 사회 내에 존재하는 명암의 차이란 어느 누구도 추측하고 상상하기 어려웠을 정도로 심각한 것임이 각종 청문회, 고문사건의 재조명,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의 비리조사 등을 통해 여지없이 증명된 것이다.
현란했던 올림픽의 인상이 불과 두 달이 지나기도 전에 아득한 옛날에 벌어졌던 「저들」의 잔치쯤으로 기억 속에 퇴색해 버린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남의 잔치가 아니었고 우리 것이었기 때문에 그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그만큼 깊은 것이다.

<민족잠재력의 재인식>
밝은 쪽을 바라보며 희망에 젖을 때 우리는 우리 민족의 기세가 하늘로 치솟고 있음을 느낀다. 역사상 어느 시기에 우리의 전자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유럽의 선진국들이 경쟁을 벌였으며 자기들의 돈을 써가며 우리기술을 배우기 위해 연수생들을 파견했던가. 일제치하 식민지적 삶과 6·25의 비극을 몸소 체험했던 세대에게는 눈물겨운 감회와 감사의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어두운 쪽을 향해 섰을 때 우리의 마음은 사뭇 얼어붙는다. 자칫 한 발만 헛디디면 모든 것을 잃고 벼랑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난했던 시절이라도 학생이 스승을 감금해 삭발시키고 고등학교 학생이 애인을 가장해 동료학생을 팔아 넘길 정도로 돈독이 올랐던 때는 없었다.
권력에 대한 아부와 굴종이 이 지경에 이르렀고 지도층의 도덕적 의지 상실이 이 정도에 이르렀던 일은 약소민족의 멍에를 지고 식민통치하에서 살았던 때에도 없었던 일이다. 권위주의를 청산하는 것은 오히려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권위는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 사람마다 저마다 집단을 형성해 물리적 힘을 과시함으로써 스스로의 권익을 확보하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는, 기존 정치 체제에 대한 완전한 불신이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의 지속적 성장과 정치의 고질적 교착상태가 공존하는 현상이 해가 가고 정부가 바뀌어도 여전히 계속되는 이 기현상의 원인은 무엇이며 부의 증가에 비례해 사회갈등이 격화되는 불행한 사태는 모두 자본주의 체제 탓으로만 돌리면 되는가.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국가들간 평화적 협동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사회주의 체제의 취약점들을 공공연하게 시인하고 나오는데 우리 사회에서만은 정치적 분위기가 그 반대 방향으로 선회하고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가.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비판으로 그 추세를 막을 수 있는 것이며 막아야하는 것인가.
우리의 정치인들이, 그리고 국민모두가 이제 깨달아야할 것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핵심은 물질적 궁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 궁핍에 있다는 점이다. 정부나 그에 대한 비판세력은 다 같이 물질의 생산과 분배의 문체만을 강조해 왔을 뿐 왜 사느냐라는 질문을 던질 여유를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며 국민은 국민대로 남보다 잘 살아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나와 같은 모습을 지닌 다른 인간들이 굶는지, 죽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정치는 협상과 조작의 기술로만 인식되었을 뿐 더불어 살고자하는 도덕적 의지와 지혜의 축척을 전체로 한다함이 잊혀지고 있었으며 국민은 삶의 주체가 아니라 생산의 수단으로 오인되곤 했던 것이다.

<정신적 궁핍의 극복을>
1988년은 이러한 국민이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임을 선언하고 그 실세를 세계 앞에 과시한 한 해였다. 그러나 주체의식과 권리의식 그 자체가 곧 창조의 의지와 역량으로 변환되는 것만은 아니며 우리 속에 담겨있는 파괴의 잠재력도 창조의 잠재력만큼이나 큰 것임이 여기 저기서 벌어지는 각종 사건들이 증명해 주고있다.
역사는 앞으로만 가지 않고 뒤로도 갈 수 있다는 예를 흔히 보여주고 있으며 바로 우리가 경계해야할 점이그것이다.
돌이켜 볼 때 1988년은 우리 역사의 방향이 최선의 길과 최악의 길 어느 한쪽으로 갈라지는 기로에 서 있던 해라고 평가될 법도하다. 우리가 최선의 길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체제 논의에 앞서 물리력에 대해 정신의 힘으로, 양에 대해 질로, 폭력에 대해 이성으로 맞서는 의지와 능력을 배양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정신적 능력을 갖추었을 때 우리는 불안 대신에 희망을 가지고 새해를 맞으며 새로이 분출되는 우리의 힘을 파괴보다는 창조에 모두 쏟을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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