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쪽밤과 다람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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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피아골 산모퉁이를 지나는데 누군가 툭 어깨를 쳤습니다. 화들짝,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밤나무에서 뛰어내린 알밤이었지요. 갈색의 빛나는 알밤, 까려고 보니 쪽밤이었습니다. 예부터 쪽밤은 나눠 먹으라고 했지요. 문득 그대의 얼굴이 떠올라 잠시 망설이는데 바위 위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결국 반은 내가 먹고 반은 다람쥐 몫으로 던져두고 올 수밖에요. 다람쥐의 가을은 밤이나 도토리로부터 오고, 뱀의 가을은 바짝 오른 독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면 그대의 가을은 무엇으로부터 오는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의 가을은 고독으로부터 오는 것. 이 가을에 외로움보다 더 좋은 양식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타인의 온기가 그립겠습니까. 고독은 비록 고독(苦毒)이지만 '나는 너의 뿌리'라는 것을 새삼 깨우쳐 주는 쪽밤과도 같은 것. 겨울잠을 준비하는 반달곰에게는 체지방이 밑천이듯 그대와 나의 근원적 외로움도 한 밑천이지요. 고립은 외따로 밀려나 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높게 서는 것(高立)입니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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