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44. 형무소 생활 <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1974년 형무소 수감 생활 직후 농장일을 재개했을 때의 필자(맨 오른쪽)와 마을 주민들.

거창한 간첩죄를 뒤집어 썼기 때문인지 1974년 수감 당시 나는 서대문형무소에서 깍듯한 사상범 예우를 받았다. 좌석도 상석이었고, 호칭은 선생님으로 통했다. 잠자리 순서도 그랬다. 당시 감방 안에는 감방장.총무.기율부장이 있었는데, 잠자리 역시 사상범이 우선이었다.

일반 잡범들은 사상범에게 깍듯했다. 사식이나 강아지(담배)도 당연히 상석이 먼저다. 그 무렵 배추라는 암호소동으로 형무소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내 별명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무료함을 달래고 용기도 얻을 겸 서로의 이름을 불러가며 통방(감방 간 대화)을 시도했다.

맨 처음에는 "야, 호철아!" "어, 배추!"하며 상대의 이름을 불러주는 식이었다. 자꾸 반복되다 보니 간수들이 이호철에게 달려가 호되게 주의를 줬다. 꾀를 낸 우리들은 그냥 "야, 배추!" "어, 배추" 하며 목소리 만으로 안부를 대신했다.

"배추!"

"배추!"

문제는 나머지 수인들까지도 덩달아 "배추"를 연호했다는 점이다. 특히 저녁 식사 뒤 내 방 네 방 가릴 것이 없이 배추란 암호 아닌 암호가 튀어나와 거의 합창을 방불케 했다. '서대문호텔'이 들썩이며 분위기가 묘하게 변해갔다. 유신체제와 형무소 당국에 대한 조롱이자, 우리끼리 단결의 구호인 양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간수들이 눈에 불을 켠 채 암호 소동을 틀어막았음은 물론이다. 10대 시절 옷차림 때문에 붙었던 별명이 반체제의 구호로 돌변했던 웃지 못할 일이다. 노나메기 농장 생활을 산산조각낸 간첩죄 명목의 형무소 생활은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갔다.

독방생활에서 벗어난 뒤 합방했을 무렵이다. 척 들어서니 방장이 짐짓 아는 체를 했다. "제가 형님을 잘 압니다"고 하기에 물었더니 50년대 명륜동에 살았던 주원복(전 고려대 미식축구 코치)과 어울리던 내 모습을 자주 봤다는 것이다.

물어보니 그는 회사(소매치기 집단)를 운영했다. 그 전에 회사원(소매치기) 생활도 했다는 그를 통해 차츰 감방 생활을 익혔다. 탁(담뱃불 붙이는 유리 조각), 마개비채(칫솔대에 유리를 박아 감방 밖을 보는 거울) 등의 은어, 그리고 담배 1개피 씩을 팔아 푼돈을 챙기는 간수들의 부업도 눈치챘다.

"어? 선생님, 출소(석방)하시겠네?"

지금도 기억난다. 그 감방장이 저녁 식사 뒤 몰래 강아지(담배)를 피려고 탁을 다루다가 손에 작은 상처를 냈다. "앗 따가워"하며 순간적으로 손을 흔들어대자 핏방울 하나가 하필 내게로 툭 하고 튀어왔다. 그때 그가 그렇게 말했다. 별 미신 같은 소리다 싶었는데 30분 뒤 간수가 소리를 쳤다.

"350번 출소!"

거짓말 같은 실화다. 당시 신문기자 이부영이 내 석방을 위해 뛰었고, 선우휘 형님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백방으로 탄원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자, 이제 석방이다. 간첩죄는 무혐의로 풀렸다지만, 망가진 내 삶은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배추 방동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