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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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죄지은 사람이 가는 곳은 감옥만이 아니다. 도리어 황야에 풀어놓기도 했다. 중국의 유배나 고대 그리스의 오스트라시즘이 바로 그런 제도였다.
이것은 요즘으로 말하면 양심범에게 주로 내려지는 형벌이었다. 물론 목을 베는 참형 같은 모진 형벌도 있었지만 정상에 따른 인도적 훈기도 있었다.
우리 나라 고려시대의 유배는 세 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왕도를 기점으로 거리에 따라 등급이 달랐다. 1등급은 3천리, 2등급은 2천5백 리, 3등급은 2천리. 그러나 리 수를 야박하게 따진 것은 아니고 대충 멀고 가까운 정도의 차이였다. 개성을 중심으로 3천리면 반도를 벗어나야 한다. 제주도 정도가 가장 먼 곳이었다.
유배기간은 다른 형벌로 대신 될 수도 있었다. 「2천리 유배」대신 장 l7, 배역 1년, 속동 80근. 「2천5백 리」는 장 l8, 배역 1년, 속동 90근. 「3천리」는 장 20, 배역 1년, 속동 1백근. 장이라면 곤장, 곧 매를 맞는 경우고, 속동은 실형대신 벌금을 무는 경우다.
배소는 죄상에 따라 한데와 따뜻한데(한난)를 가렸고, 교통편의도 참작됐다. 육지의 변두리와 무인도, 유인도로도 구별했다.
조선왕조는 1895년부터 유형기간을 명시했다. 종래의 1등급 유형은 종신, 2등급은 15년, 3등급은 10년. 그후 유형 제도는 더 세분되었다. 종신,15년, 10년, 7년, 5년, 3년, 2년 반, 2년, 1년 반, 1년 등 모두 10등급.
유배는 비록 형벌이긴 하지만 당하는 쪽에선 절망의 경지만은 아니었다. 유배지에서 오히려 창조적인 정열로 스스로 절망을 이겨낸 사람들도 많다.
다산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꼬박 앉아서 글만 썼다. 한때는 엉덩이가 진 물러 더 이상 앉아서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는 벽에 선반을 매고 일어선 상태로 저술을 계속했다. 이번에는 팔꿈치에 옹이가 박혀 고생했다. 유배생활 18년 동안 그는 무려 5백권의 저술을 남겨 놓았다.
물론 다산과는 격이 다르지만 전두환씨는 이제 유배 아닌 유배를 떠나는 신세가 되었다. 떠나는 사람도, 이를 지켜보는 사람도 마음이 무겁기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은 이제 우리의 정치사에서 마지막 보는 불행한 대통령이어야 한다. 그 점에서 그는 뼈아픈 교훈을 남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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