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기의 反 금병매] (13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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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휘종 당시 재상은 채태사와 같은 가문인 채경이었다. 환관의 우두머리는 동관이었는데 채경과 동관이 심약한 휘종을 따돌리고 권력을 자기들 마음대로 휘둘렀다. 특히 두 사람은 수석들과 기이하게 생긴 돌들, 즉 기석(奇石)을 수집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강남을 비롯한 먼 곳까지 관리들을 보내어 그러한 돌들을 가지고 와 자기들 저택을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서민들 집에서 그러한 돌들을 발견하면 관리들은 그 돌에다 궁중 어용품이라는 표시로 누런 빛깔의 종이를 붙여 빼앗아갔다. 그리고 커다란 기석을 운반할 때 담장이 방해가 되면 누구의 집이든 담장을 허물어 버리고, 가옥이 가로막고 있으면 심지어 그 가옥까지 허물어 버렸다.

목주 청계현 일대에서 수석과 기석의 채집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가장 많이 착취를 당하였는데,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머슴 출신인 방랍을 수령으로 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방랍의 무리는 칠현에 집결하여 성명을 발표하였다.

"우리 백성들은 일년 내내 피땀을 흘려야 겨우 약간의 곡식과 피륙을 얻어 목숨을 연명하게 되는데, 조정의 관리들은 그것마저 빼앗아 자기들만 호의호식하고 있다. 관리들은 자기들 배를 채울 뿐만 아니라 그 나머지는 우리들의 적인 요나라와 서하에 세공으로 바치고 있다. 그 나라들을 살살 달래야 우리가 편하게 살 수 있다고 하지만 결국 우리들의 피땀으로 적을 길러주고 있는 셈이다. 그 적들이 쳐들어오면 나라에서는 우리들을 방패막이로 써먹을 것이 뻔하다. 자, 이제 우리가 팔을 걷어붙이고 무기를 들고 분연히 일어나면 10일도 안 되어 수만 명의 무리가 모여들 것이다."

과연 10일도 안 되어 원근 각처에서 10만 명도 넘는 무리가 모여들었다. 방랍의 무리는 대오를 갖추어 북쪽으로 진군하여 항주, 절강, 안휘, 강서 지방들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어느새 그들의 병력은 백만 명을 넘어섰다. 방랍은 왕국을 세워 스스로 성공(聖公)이라 일컫고 연호를 영락(永樂)으로 정하였다.

방랍이 이끄는 반란군은 주로 지방 부호들과 부정부패를 일삼는 악덕 관리들을 공격하여 그들이 모아둔 재물들을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당시의 부패한 정치에 불만을 품은 호걸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산동 양산박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의 우두머리격인 송강을 비롯한 36명의 호걸들이 무리를 이끌고 산동과 하남 일대에 출몰하여 관군들을 괴롭혔다. 양산박 1백8명의 영웅호걸 이야기가 '수호지'에 기록되어 있고, 지금 옥에 갇혀 있는 무송도 그 호걸들 중 하나인 셈이다.

참으로 민심이 흉흉하고 정치 지도자들은 부패하거나 무능하기 짝이 없는 시대였다.

채태사는 최고의 지위에 있는 문관으로서 어지러운 정치를 수습해 보려고 하였지만, 워낙 간계에 능한 실력자들이 막후에서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어 자신은 늘 역부족임을 통감하였다. 그런 중에도 자기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구석이 나름대로 없지는 않았다.

무송의 재판을 맡은 동평부 부윤 진문소도 채태사의 문하생으로 그의 후원에 힘입어 출세한 사람이었다.

서문경은 금련과 의논한 대로 딸의 시댁인 진씨네를 통하여 동경의 양제독에게 줄을 대어 그에게 뇌물과 편지를 건네었다. 양제독은 또 채태사에게 뇌물이 아닌 것처럼 선물을 하며 서문경의 편지를 전하였다.

채태사는 서문경의 편지를 통하여 진문소가 청하현 현감을 무시하고 월권행위를 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되었다. 청하현 현감도 채태사의 사람이라 할 수 있었으므로 채태사로서는 그 두 사람이 하찮은 사건으로 불화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채태사는 평소에도 진문소가 지나치게 청렴결백한 것이 늘 조마조마할 정도로 불안하였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따지면 친구가 없다고 했던가(水至淸則 無魚, 人至察則 無徒). 이번에도 적당히 넘어갈 일을 가지고 진문소가 너무 따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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