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문화읽기] 권투장갑은 때리는 사람 보호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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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권투는 기원전 688년 고대 올림픽대회에 정식종목으로 채택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스포츠다. 6천년 전 이집트 상형문자에도 경기 장면이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사실 초창기 권투의 모습은 운동이라기보다 결투에 더 가까웠다. 시합은 야외 원형 경기장에서 가졌는데, 체중에 의한 체급 구분도 없었고, 라운드 수도 정해져 있지 않았으며, 어느 한쪽이 쓰러져 일어나지 못 할 때까지 경기는 계속됐다.

'원형 경기장'의 전통은 현대 권투에선 사라졌지만, 권투경기장이 사각형임에도 불구하고 '링'(Ring)이라 부르는 것은 아마도 고대 올림픽의 전통을 이어받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18세기 영국에서 근대 복싱이 시작되면서 권투는 '정정당당한 규칙 안에서 인간의 폭력성을 해소하는 가장 격렬한 운동'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권투 선수들이 서로 주먹질을 주고받으며 피 터지게 싸우면서도 우리가 이 스포츠를 그나마 안전하다고 여기는 것은 손에 푹신한 장갑을 끼고 있고 '복부 이하를 가격하면 안 된다' 같은 엄격한 규칙이 있으며, 3분 경기 하고 1분 쉬는 라운드제로 진행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권투 장갑은 맞는 사람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끼는 것이 아니라 때리는 사람의 손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대 권투경기에선 때리는 사람의 손이 부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붕대 모양으로 자른 부드러운 송아지 가죽을 손에 둘렀다. 근대 권투 경기에선 처음엔 맨손으로 싸웠으나 손을 보호하기 위해 1747년 글러브의 초기 형태인 '머플러'를 고안하게 됐다.

권투 장갑을 끼면 맞는 사람에게 가하는 충격은 오히려 더 커진다. 권투 장갑을 낀 주먹에 맞으면 2백~4백g 정도의 장갑 무게가 더해져 운동에너지가 증가해 뇌로 가해지는 충격은 더 커진다. 연예인들이 TV 오락프로그램에서 얼굴보다 큰 장갑을 끼고 우스꽝스럽게 권투를 하는 장면을 보면 가볍게 맞았는데도 휘청거리거나 쓰러지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것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게다가 권투 장갑은 맞는 사람의 외상을 줄여주고 경기 시간을 지연시키는 효과가 있어 한 경기당 받는 충격의 총합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치명적일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권투선수들은 오랜 경기로 인해 심각한 뇌 손상을 받아 은퇴 후 '펀치 드렁크' 증세를 경험하게 된다.

아무리 뛰어난 권투 선수라도 '잔매에 장사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 곳에 있었던 것이다.

정재승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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