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저격' 전문 공격수 北 이용호, 싱가포르 등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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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하는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3일 오전 싱가포르에 도착해 숙소인 한 호텔로 들어가고 있다. 리 외무상은 호텔 정문에서 대기하던 내외신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은 채 승강기에 탑승했다. [연합뉴스]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하는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3일 오전 싱가포르에 도착해 숙소인 한 호텔로 들어가고 있다. 리 외무상은 호텔 정문에서 대기하던 내외신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은 채 승강기에 탑승했다. [연합뉴스]

북한의 대외 메시지 관리를 도맡아온 이용호 북한 외무상이 3일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참석을 위해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잇딴 핵·미사일 도발로 고립감만 느껴야 했던 지난해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서다.

이 외무상은 중국 베이징에서 출발한 에어 차이나 항공편을 타고 이날 오전 5시54분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도착했다. VIP 통로를 통해 공항을 빠져나온 이 외무상은 곧바로 검은색 BMW 세단을 타고 인공기를 단 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시내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그를 비롯한 북한 대표단이 머무는 소피텔 시티센터 호텔에는 이른 아침부터 한국과 일본 등에서 온 취재진 수십명이 몰려들었다. 이 외무상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만날 계획이 있느냐” 등의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고 호텔 측이 준비한 꽃다발만 받아든 채 엘레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갔다. 검정색 양복에 옅은 보라색 넥타이 차림의 그는 야간 비행 때문인지 다소 피곤한 표정이었다.

그가 외무상 자격으로 ARF에 참석한 것은 올해로 세번째다. 이 외무상은 지난 2016년과 2017년에는 ARF를 대미 공격의 무대로 삼았다. 2016년 7월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열린 ARF 참석 뒤 그는 기자들을 만나 “추가 핵실험 여부는 전적으로 미국에 달렸다”, “조선반도 비핵화는 미국이 하늘로 날렸다”고 공격적인 언사를 쏟아냈다. 지난해 필리핀 마닐라에서는 회의장 밖에서 직접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기자들에 배포한 서면 입장에서 “압박이 있는 곳에는 반항이 있듯이 핵위협이 있는 곳에는 핵억제력이 나오기 마련”이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뒤 열리는 올해 ARF는 상황이 다르다. 이 외무상은 중국과 러시아 등 전통적인 우방국 3개국과의 양자 회담에 그쳤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5~6개국 외교장관과 공식 회담을 할 예정이다.

아세안 국가 중에는 캄보디아, 라오스 장관과 만날 것이라고 한다. 다만 이는 북한의 요청에 따른 것이며, 캄보디아와 라오스 측은 “북한 외교장관과 회담을 하지만, 북한 노동자 고용 중단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른 대북 제재를 충실히 이행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는 입장을 이번 회의 중 여러 계기에 밝혔다고 한다. 이 외무상은 회의 일정 뒤에는 싱가포르를 공식방문하는 형식으로 추가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남북 및 북·미 외교장관 회담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한국은 북한에 외교장관 회담을 원한다는 의사를 전했으나 확정된 것은 없다. 미 국무부 고위 당국자는 2일 말레이시아로 향하는 기내에서 기자들을 만나 “(북한과의 만남을)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면서도 “(ARF)행사장에는 약 30개국의 외교 장관이 모이고, 이는 다양한 형태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 폼페이오 장관은 그의 카운터파트 중 많은 장관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해 여지를 남겼다. 폼페이오 장관은 말레이시아 방문 뒤 3일 오전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북한 대표단에는 북·미 관계를 전담하는 외무성 북아메리카국 당국자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북아메리카국은 그간 미국과의 핵 협상에도 관여해왔다. 이번 ARF에는 동남아시아 업무를 맡는 아시아2국 및 국제기구국 당국자들만 포함됐다. 대표단 규모도 5명 남짓으로 조촐하다. 하지만 이용호 외무상 본인이 오랜 기간 북핵 협상에 관여해왔기 때문에 북·미 외교장관회담성사시 핵 문제가 논의될 여지는 충분하다.

공식 회담은 미정이지만 만남의 기회는 있다. 3일 저녁 열리는 갈라 만찬에는 남·북·미·중·일·러 등 ARF 참가국 외교장관이 모두 참석할 예정이다.

싱가포르=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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