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읽기] 노래 가사부터 시나리오까지 종횡무진 '잡가인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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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구름의 역사
한운사 지음,민음사
341쪽, 1만5000원

"잘살아 보세 잘살아 보세/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1962년 발표된 '잘 살아보세'는 당시 실세 정치인 김종필씨가 "많은 이들이 함께 부를 큰 노래를 지어달라"는 의뢰를 함으로써 만들어졌다(134쪽). 작사를 의뢰받은 이는 한운사. 그는 당시 '현해탄은 알고 있다'로 라디오 청취자들의 귀를 즐겁게 했던 드라마 작가.

'남과 북''서울이여 안녕' 등 라디오.TV 드라마 극본과 영화 시나리오를 합쳐 그가 만들었던 것은 무려 100편 내외. '아낌없이 주련다''빨간 마후라'처럼 그들 중 상당수는 영화로 재탄생했다. 해서 스스로 붙인 문패가 '잡가(雜家). 경성대 예대 출신의 한운사(84.한국방송작가협회 고문)씨가 자신의 삶을 회고한 '구름의 역사'는 이렇듯 개인사이면서도 현대문화사를 짙게 반영한다. 그만큼 보편성을 인정할 만하다.

책은 2년 전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연재물과 함께 신문.잡지 기고문을 덧붙였다. 짧고 스피드 있는 문장에 에피소드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도 사실의 무게가 예사롭지 않다. 이를테면 방송작가 활동 이전에 한국일보 문화부장으로 있던 그가 발굴했던 '무서운 젊은이'가 문학평론가 이어령씨.

당시 신출내기 대학생이었던 그가 평론가 조연현, 소설가 김동인 등이 좌지우지하던 기성문단을 융단폭격하는 글'우상의 파괴'를 부탁해 거침없이 지면에 실었다. 그걸 신호탄으로 문단의 세대교체가 빨라졌으니 한씨의 결단은 가히 문화사적 사건을 '연출'한 셈이다. 뒷얘기도 흥미롭다. 본래는 이어령씨 대신 당시 열혈 문청(문학청년) 박맹호(현 민음사 회장)씨를 섭외했다는 것, 그런데 박씨의 고사로 이씨에게 원고가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게 56년 무렵.

책 제목 '구름의 역사'는 한씨의 아호이자 필명인 운사(雲史)에서 따왔다. "한 가닥 구름 이는 것이 태어남이요,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라." 헛헛한 달관이 배어있으면서도 운치 넘친다.

조우석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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