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아나운서와 '통일 스튜디오' 11년

중앙일보

입력

"우리 스튜디오는 벌써 통일이 된 느낌입니다. 통일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봅니다."

러시아 국영 라디오 방송 '러시아의 소리' 한국어부에서 11년째 북한 출신 아나운서와 함께 일해 온 박경원(55.여)씨의 통일론이다. 그는 "북쪽 사람과 오래 같이 일하다 보니 남북 간의 이질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1929년 첫 전파를 쏜 '러시아의 소리'는 현재 러시아 국내외 정치 뉴스와 역사.문화 등에 관한 정보를 매일 32개 외국어로 전 세계에 전하고 있다.

1992년부터 이 방송사에서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는 朴씨는 러.북 간 방송 교환 협정에 따라 북한 중앙방송에서 파견되는 남자 아나운서와 한조가 돼 한국어 방송을 진행한다. 그동안 두명의 북한 아나운서가 다녀갔고, 현재 부임한 지 2년째가 되는 김영(44)씨와 입을 맞추고 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북한 아나운서와 자주 다투었습니다. 그들이 북한식 표현을 고집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굳이 '김정일 영도자'로 읽어야 한다는 식이었습니다. 또 황장엽씨 망명 사건을 보도할 땐 남한의 납치극이라고 우겨 스튜디오 분위기가 살벌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투는 일이 거의 없다.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남과 북이 다르게 쓰는 표현은 각자 방식대로 읽기로 합의했다.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다 보니 맛있는 음식을 하면 나눠먹을 정도가 됐다.

朴씨는 이처럼 서로를 이해하게 된 데는 마음을 터놓고 나눈 대화가 밑바탕이 됐다고 한다.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북핵 사태도 남과 북은 물론 주변국들이 서로가 조금씩만 양보해 하루 빨리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한다"는 게 朴씨의 바람이다.

92년 목사인 남편을 따라 처음 모스크바 땅을 밟은 朴씨는 한국에서 프리랜서 아나운서로 일한 경험이 계기가 돼 방송일을 시작했다.
[모스크바=유철종 기자]cjyo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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