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인연과 악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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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은 인연입니다. 윤회나 환생을 믿지 않더라도 소중하지 않은 인연은 없지요. 처음엔 사소하여 잘 알아보지 못할 뿐, 이 사소함이야말로 존재의 자궁 같은 것. 블랙홀이나 미로일 수 있지만 바로 이곳에서 꽃이 피고 새가 웁니다.

연기암의 물봉선 하나가 지는데도 필연적인 이유가 있고, 그 꽃잎 위에 내린 이슬 하나에도 실로 머나먼 여정과 엄청난 비밀이 스며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 65억분의 1의 확률로 만난 그대와의 인연, 그 얼마나 섬뜩할 정도로 소중한지요. 극소와 극대, 순간과 영원은 다르지 않습니다. '어려서 죽은 아이보다 오래 산 자는 없다'는 말을 이제야 알 것도 같습니다.

돌아보면 마치 전생의 악연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그동안 우리는 또 마주치지 않으려고 얼마나 오랫동안 몸부림을 쳤는지요. 악연은 한 하늘 아래 살면서 아예 만나지도 못하는 것. 결국 인연과 악연의 그 무서운 갈림길은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아직은 가지 않은 길, 악연의 길을 가기엔 이 가을이 너무나 짧습니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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