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혁신 스트레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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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 중앙부처 공무원 김모(30)씨는 3월 중순 직장 동료 10여 명과 함께 한 장애인 시설을 찾았다. 이들은 3시간의 봉사활동을 마친 뒤 봉사활동 인증서를 손에 쥐고 돌아왔다. 부서에 인증서를 내고 '혁신 마일리지' 0.5점을 받았다. 김씨는 "점수 때문에 봉사활동을 한 것이라 개운치 않지만 혁신점수가 워낙 강조돼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사례 2. 지방공무원 박모(38)씨는 지난달 공문을 받아들고 한숨을 쉬었다. '혁신과 관련된 책을 한 달에 한 권씩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다. 박씨는 "목록에는 '좋은 인맥을 만드는 43가지 테크닉' 등 처세술에 관한 책이 많고 업무에 참고할 책은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혁신 마일리지 1점을 얻기 위해 박씨는 A4지 두 장을 꽉 채워 독후감을 써냈다.

요즘 공무원들 사이에 혁신 마일리지 점수 따기 경쟁이 치열하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혁신만이 살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 뒤 '혁신 마일리지'가 현 정부의 대표적 전략상품으로 등장했다. 공무원 개인의 혁신활동 실적에 따라 점수를 매겨 근무평정과 성과급 차등 지급에 반영한다는 게 골자다. 공직사회에 새 바람을 불어넣자는 취지다. 하지만 부처마다 혁신의 외양에 과도하게 집착하다 보니 한쪽에선 희화(戱畵)적인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지식관리시스템(내부통신망) 게시판에 질문을 올렸던 한 중앙부처의 공무원 이모(27)씨는 '웃분의 답변이 훌륭합니다'는 글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답변을 올리면 주는 0.5점의 마일리지를 얻기 위해 누군가가 쓸데없는 글을 올린 것이다. 같은 글을 두 번씩 올리는 '얌체족'도 있었다.

마일리지를 얻기 위해 워드 1급 자격증 시험을 준비 중인 공무원 최모(25)씨는 최근 선배들에게서 "3급부터 따라"는 조언을 들었다. 처음부터 1급을 따면 3점만 인정되지만 3급-2급-1급을 차례로 따면 6.5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혁신독후감의 경우 책은 읽지 않고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요약본을 베껴 내는 일도 벌어진다. '혁신 관련 동아리'도 여기저기 생기고 있다. 과천의 모 경제부처의 경우 참석만 하면 마일리지를 주기 때문에 직원 1명이 평균 2개의 학습동아리에 가입해 있다. 한 지방 공무원은 "점수를 공개하고 경쟁을 시키니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며 "혁신 마일리지 때문에 뺏기는 업무시간이 너무 많다"고 불평했다. 전문가들은 공무원 혁신이 성과를 거두려면 일선의 자발성을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성대 권해수(행정학과) 교수는 "지금처럼 상부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혁신 운동은 '코드 맞추기'에 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행자부 관계자는 "지난해는 '혁신 확산기'여서 동기 부여를 위해 마일리지가 부각된 측면이 있지만 지금은 혁신활동이 뿌리내리는 단계로 부작용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한애란 기자

◆ 혁신 마일리지=2004년 4월 공정위가 처음 도입한 이래 대부분의 중앙부처와 지자체.교육청에서 시행 중이다. 평가 대상은 국.실장급 이하에서 4급 이하까지 기관마다 다르다. 점수를 받을 수 있는 혁신활동엔 제도개선 아이디어, 봉사활동, 세미나 실적 등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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