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기다림의 자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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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코스모스 길을 따라 그대에게 갑니다. 그대도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노래를 부르며 이리로 오고 있겠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코스모스 꽃들이 저리도 흔들리겠습니까. 지리산 반달곰은 반달곰의 자세로, 섬진강 쏘가리는 쏘가리의 자세로, 천년의 주목은 주목의 자세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걸어본 사람은 십리 길이 어째서 십리 길인지, 백리 길은 어째서 백리 길인지 압니다. 걷다가 한번쯤은 꼭 쉬게되는 거리가 바로 십리이며, 하루 종일 걸어서 도달할 수 있는 거리가 바로 백리이지요. 오래 걷다보면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고, 또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조차 멍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그리워 하다보면 문득 그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바로 그 순간이 기다림의 절정입니다. 기다림은 대문 앞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걸어서 누군가에게로 가는 것. 그리하여 봄꽃들이 피면서 북상할 때엔 꼭 사람의 걸음걸이로 올라가고, 단풍이 남하할 때엔 꼭 사람의 속도로 내려옵니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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