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도 발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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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국스포츠의 역사는 역도와 함께 시작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역도가 아시아권에서조차 밀리고있지만 45년 이후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세계무대의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아시아 무대를 주름잡았었다.
물론 베를린 올림픽(36년)에서 손기정씨가 금메달을, 남승룡씨가 동메달을 차지하면서 마라톤이 한국스포츠의 서장을 열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역도의 김성집(69)씨가 48년 런던올림픽 미들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것이 우리나라스포츠가 국제무대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김성집씨는 이보다 1년 전인 47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 동메달을 차지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52년 헬싱키 대회에서도 동메달, 56년 멜버른대회에서 5위를 차지, 국내스포츠의 간판스타로 군림했다. 뒤를 이어 김창희씨(67)가 54년 제2회 마닐라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멜버른 올림픽 라이트급에서 동메달을 획득, 한국역도의 명성을 세계에 과시했다.
60년대 들어서도 원신희씨(42)와 양무신씨(46)가 비록 세계무대에서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아시아권에서는 명성을 그게 떨쳤다.
원신희씨는 66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딴 뒤 70년 아시안게임에서는 은메달을, 그리고 74년 테헤란대회에서는 인상·용상·합계에서 모두 금메달을 차지, 아시아역도의 강국으로서 면모를 과시했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부터 한국역도는 쇠퇴를 거듭, 뚜렷한 스타플레이어를 배출하지 못하고 78년 방콕아시안게임(90kg급)과 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1백kg급)에서 금메달을 딴 안지영(29)에 의해 겨우 명맥을 유지해왔다.
이 때문에 역도를 사랑하는 펜들은 물론 많은 역도인들이 한국역도의 부진을 안타까워했으며 하루빨리 유망한 신인들이 나와 찬란했던 선배들의 뒤를 이어 줄 것을 학수고대해 왔다.
야구·축구·농구·배구·씨름 등 인기종목의 그늘에 가려 우수선수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던 국내역도는 83년 전국소년체전에서 전병관이 혜성처럼 등장하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전역도인들이 88유망주로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국내역도는 전선수로 인해 활기를 되찾았으며 이로 인해 국내역도가 활성화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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