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처럼 은은한 품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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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동양인 최초의 줄리아드 음악박사로 소개된 이학녀의 귀국피아노 독주회(15일 밤 호암아트홀)는 저간의 풍성한 공연 분위기에 들떠있던 우리의 정서를 깊어 가는 가을밤의 정적만큼이나 묵직한 무게로 차분하게 해주었다.
마치 앞마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왁자지껄한 잔치 판을 피해 잠시 한적한 뒤안길에 물러앉아 세월을 생각하고 인생을 반추해보는 주름골 깊은 어머니의 심상과도 흡사한 시간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음악 속에는 현란한 명인기나 숨막히는 감정의 기복에 앞서 고요한 사색 속에서 배어나는 관조적 삶의 체취와 달관된 예술의 정취가 있었다.
파란 하늘을 이고 새하얗게 피어있는 목화송이처럼 부드러운 음향에 파스텔 색조처럼 단아하고도 우아한 음색과 가슴속 심연으로부터 우러나는 유연한 템포·루바토가 엮어내는 피아니즘의 세계는 가위 한 폭의 문인화처럼 은은한 품위와 깊은 인생에의 체관을 직조해 냈다.
한마디로 이학녀의 피아노는 마지막 코드가 끝나기가 무섭게 우뢰와 같은 박수를 몰고 오는 직업적 스타풍의 연주는 아니며, 마치 정숙한 규수의 나직한 속삭임과도 같은「하이든」소나타의 섬세한 터치로 시작해서 「슈만」팬터지의 마지막 피아니시모의 케이던스로 마무리한 그녀의 프로그래밍이 말해주듯 역시 그녀의 예술적 본령은 여성적 온유를 바탕으로 한 서정적 아카데미즘에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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