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권 예술 큰 눈으로 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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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세상 많이 변했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문맥에 따라 함축은 다르다. 긍정적으로 토로되기도 하고 과연 변혁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는 회의론의 표명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건 변화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최근 열렸었거나 진행되고 있는 올림픽 문화축전, 학술 올림픽, 혹은 펜대회 같은 행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것을 실감하게 된다.
30여년 전인 56년인가에 미국의 교향악단이 와서 「베토벤」5번 교향곡을 연주한 일이 있었다. 지휘자 없이 연주하여 화제가 되었는데 연주장소가 중앙청 마당이었다. 노인들은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고, 젊은이들은 금시초문일 것이다.
그런데 서울에 가령 스칼라오페라단이 들러 동양 최대의 시설과 수용력을 자랑하는 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공연하는 것을 볼 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요즘의 행사에서 세상 변화를 가장 실감하게 한 것은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참여였다. 소련 발레단의 공연이 선풍을 일으켰다. 또 비슷한 선풍이 줄이어 예고되어 있다.
『영어를 못해서가 아니라 러시아말을 서울에서 울리게 하기 위해서 러시아말로 연설하겠다』는 소련 작가 동맹 제1서기의 펜대회 발언이 세상변화를 가장 간결하게 증언해 주었다.
변화의 실감과 함께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동구권 예술공연이 보여준 예술적 탁월성이었다고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동의 이면에는 석연치 않은 국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념이 예술을 규제하고 있으며 예술가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는 동구권 예술에 대한 편향된 견해가 충격과 감동의 전제가 되어준 것이다. 그것은 닫혀진 정보소통과 함께 우리 쪽의 태만이 빚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도 이번에 올림픽 문화축전이 열린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예술의 언어는 특수한 것인 채로 보편언어를 지향한다.
이념을 넘어서 사람에게 호소한다. 또 모든 예술 장르는 그 장르에 고유한 예술적 성취의 척도가 있게 마련이다. 예술적 성취를 지향하는 한 이념이 전부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동구권 예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관은 처음부터 피상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자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예술적 노력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시민적 의무나 역사에 대한책임과 마찬가지로 종사하는 예술에 대한 직분충실도 중요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치열하고 철저한 장인기질이 각 분야에서 요청되고 있다.
우리는 또 이번의 각종 문화행사가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도록 해야한다. 우리의 충격과 감명이 태반은 우리의 편견이나 좁은 시야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열려있는 시각을 위한 사회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문화예술의 총체적 이해는 사회의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볼쇼이발레단 소속의 무용수가 공연에 참여했다면 모스크바에서의 발레 관객은 1년에 얼마이며 또 주로 어떤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는가 정도는 알아야 할 것이다. 모스크바 필하머닉 오케스트라나 모스크바 방송 합창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교향악단이 소련에 몇 개나 있으며 연주는 1년에 몇 회나 하며 단원들의 사회적 위치나 보수는 어떻게 되는가?
다시 말해서 동구권 사회에서 예술의 위치는 어떻게 되어있는가? 연주곡의 선정은?
이러한 총체적 이해를 위한 정보는 하나도 제시함이 없이 한국계 소련인에 대한 감상적이고 피상적인 보도만을 일삼는 것은 성숙한 태도라고는 할 수 없다. 사람의 눈물은 고귀한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아무 데나 줄줄 흘리는 것이 아니다.
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프투셴코」가 인기 있는 시인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시집 판매 부수로 결정되는가? 시 낭독회 청중 수효로 결정되는가? 혹은 작가동맹 기관지의 판단에 의한 것인가? 우리들은 궁금한 것이 많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다른 동구권 문학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번 문화축전을 진정 뜻깊은 것으로 하기 위해선 그쪽 문화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 그 의미가 완성되고 세계 이해를 위한 안목이 트이는 것이다. 세계 이해가 우리 좌표의 확인으로 이어질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개방이라는 점에서나, 풍요라는 점에서나 최근의 각종 축전은 세상변모를 실감케 하는 큰 사건이었다.
낭비라든가, 졸속에 따른 소홀함을 보충하는 길은 문화개방의 지속밖에 없다. 가장 큰 의미가 거기에 있다.
이번 축전은 여러모로 우리자신에 대한 홍보의 계기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이고 낭비 없는 홍보가 정치적·사회적 민주화의 실현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선 안 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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