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치원의토론이야기] 가족문제, 가족회의로 풀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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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공정한 절차와 진행자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깨달음 때문이다. 수년 전 일이다. 한 일간신문 특집에 우리 가족이 소개된 적이 있다. 그 무렵 나는 원탁토론 운동을 열심히 펼치고 있었고, 나름대로 가족회의를 중요시했다. 하지만 말이 좋아 회의지, 일방적 잔소리만 늘어놓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날은 그럴 수 없었다. 취재기자가 진행했기 때문이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주재할 때와는 달리 우리 아이들과 집사람의 입에서 더 많은, 그것도 의미심장한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큰아이는 '이해찬 세대'다. 중학생 시절 당시 유행했던 '학교 밖에 길이 있다'는 신문광고 스크랩을 공부방에 붙여 두었다. 영화에 관심을 두다 보니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떤 직업을 갖든 보편적 소양을 위해 우선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단다." 하지만 내 말은 아이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회의에서 아이는 이 말을 설득력 있게 받아들였다. 웬일인가?

그것은 그날 회의에서 진행자가 제삼자로서 내용으로부터 초연했기 때문이다. 또 아빠는 강압적이지 않은 대등한 토론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 회의에서 어른은 진행자로서 공정한 절차에만 관여하든지, 아니면 토론자로서 대등하게 발언해야 한다. 그래야 설득력이 있다. 공식 회의에서 의장은 토론에 참여하게 되면 그 안건의 표결이 끝날 때까지 의장석에 돌아올 수 없는 법이다. 대체로 회의가 망쳐지는 것은 주재자가 말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도 있다. 큰아이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몇 차례 술에 취해 밤 늦게 귀가했다. 어느 날 가족회의에서 작은아이가 했던 말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형은 나더러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만 하면 뭐하나. 밤 늦게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생각하느라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는데." 큰아이의 귀가시간이 빨라진 것은 그 이후다. 아내와의 사이에 문제가 생겨도 둘이서보다는 아이들이랑 함께 푼다. 대화가 자칫하면 부부싸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양자간 대화로 풀리지 않는 문제는 다자간 회의로 풀어라.

회의에서 안방 같은 편안한 분위기 못지않게 공식적 절차가 중요하다. 하지만 자유로운 회의를 한답시고, 한 사람만 자유롭게 말하는 게 보통이다. 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위해서 필요한 게 절차다. 절차가 자유로울 때보다 엄정할 때 오히려 소통이 잘 되는 경우도 많다.

대학시절 배웠던 결코 잊혀지지 않는 총장의 말이 있다.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야성(감성)의 조화." 이성(감정)이 지나치면 감정(이성)은 메말라버린다(타죽는다). 이성은 감정의 거리두기 (emotional distance)가 적당할 때 발동한다. 가족회의에서도 마찬가지다.

강치원 원탁토론아카데미 원장 강원대 교수 (wontak21.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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