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과 88 뒤 불안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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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올림픽 후에 대한 걱정과 논의가 오래 계속되고 있다. 밤이 길면 꿈이 많다는 격으로 여러 가지 풍설과 갖가지 추측들이 나오고 있다.
가령 수구 극우세력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란 막연한 풍설이 있는가 하면, 올림픽이라는 안전판의 약효가 떨어지면 각계의 욕구분출 현상이 일어나 혼란이 올 것이라는 우려가 있고, 올림픽 때문에 참고 있던 정부가 마침내 칼을 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따지고 보면 올림픽 후를 걱정할 근거는 많다. 극심한 이념대립현상, 여소야대 정국의 불안한 장래, 5공 비리조사와 관련한 구세력의 반발, 물가 등등 걱정거리는 한두 가지가 아니고 이런 일의 원만한 해결에 대한 낙관적 조짐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건전한 사회라면 이런「불안설」이 그렇게 판을 칠 수도 없겠지만 그런 현상이 있으면 그 근거가 되는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그것을 진정시킬 대응노력이 당연히 나와야한다.
그런 일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l차 적으로는 정부·여당이 해야한다.
최근 노 대통령의 3김 총재와의 연쇄회담이나 기자테러사건에 대한 뒤처리 등을 보면 정부·여당 역시 나름대로 올림픽 후의 정국과 국민불안감을 의식하고 대용노력을 벌이는 것 같다.
그러나 최근 여권정치의 흐름을 보면 불안설에 대한 진정노력보다는 결과적인 증폭움직임이 많고 심지어 여권자체가 불안설의 원천 노릇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주는 일도 있다는 생각이다.
가렴 얼마 전 불쑥 나온 내각제개헌론이나 연정론 같은 것도 가뜩이나 뭔가 있겠거니 했던 보통사람으로서는 역시 그랬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들고 올림픽 후 어차피 큰 정치적 변화가 오겠구나 하고 느끼게 한 건 아니었을까.
또 총무처장관의 체제선택론이나 내무부의 우익궐기론 배포도 결과적으로 이념논쟁을 격화시키고 정부의 의도가 원가 하는 의혹만 불러일으켰다.
기자테러사건은 여권을 불안설의 원천으로 만든 가장 극적인 사례다.
비록 사건의 신속한 마무리로 표면상 불길은 감았지만 이사 건이 상징하는 여러 가지 가능성과, 미루어 짐작되는 군 내부의 기류를 생각하면 이 사건이 준 불안감은 국민 마음속에서 그리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민정당 내에서도 변화를 대망하는 소리들이 많이 나온다. 연정론도 그 중의 하나지만 정계개편론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보수대연합 같은 얘기는 이미 오래된 것이고 최근에는 민정당의 발전적 해체설 같은 것도 나온다고 들린다.
전임 대통령의 인맥인 지금의 민정당을 해체하고 노 대통령 인맥을 중심으로 야당인사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여당을 만들자는 것이 대충 이 아이디어의 골자라는데, 보통사람들은 이런 얘기의 현실적 근거나 실현 가능성 또는 추진 시기 등에 대해서는 통 알 길이 없다.
이런 여러 가지 얘기들이 따지고 보면 다 현 정국을 극복하려는 여권의 나름대로의 처방으로 제시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여권 내 갈등의 표출인지, 혹은 고도의 기술적 차원의 발언인지, 사견인지 아닌지 통 알 수 없게 밑도 끝도 없이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나오고, 유비성으로 퍼지고 있어 뭔지 몰라도 올림픽 후 여권주도의 격동이 있겠구나 하는 예감을 가중시키는 꼴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여권 움직임을 보면 여권 안에 과연 합의된 민주화의지가 있는지 의심을 갖게 되고 이런데서 이런저런 억측도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하게 보이는 것은 여권의 능력문제다. 여소야대의 정국을 주도하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혼란에 대처하는 능력, 자체세력을 장악하는 능력이 과연 오늘의 정부·여당에 있을까 하는 불신감이 각종 불안설의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기자테러에서 보듯 정부가 군을 잘 장악하고 있는지, 전남지사의 거짓말에서 보는 것처럼 공무원은 잘 통술하고 있는지 도무지 신뢰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정부·여당간에 손발도 맞지 않는 것 같다. 자기당 총재의 야당총재들과의 연쇄회담도 신문을 보고야 알고, 장관이 야당의원과는 헬리콥터에 동승해 우박피해를 시찰하면서도 기다리던 민정당 위원장은 만나지도 않고 가버려 이게 어느 당 정권이냐고 분통을 터뜨렸다는 얘기도 있었다. 월여 전 어떤 신문의 여론조사결과로는 노 대통령의 인기는 53·4%인데 민정당 지지도는 21·1%로 4당 중 2등을 했다는 것으로 나타나 오늘의 집권당은 총재 따로 당 따로 인가하는 얘기도 나왔다.
5공 비리조사에 있어서는 과연 당 방침이 무 성역주의인지, 비호주의인지 당직자도 모를 정도로 엉거주춤, 어정쩡한 입장이다.
여권내부의 패배주의도 심각한 듯하다. 가령 36·7%의 집권이란 귀따가운 소리를 손쉽게 극복할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을 국민투표에 의한 중간평가를 꺼려하는 것이 그런 예다.
이처럼 여권이 자신 없어 하고 태세가 잡혀있지 않고 내부적으로 합의된 민주화 의지도 있어 보이지 않고 의도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보이는 것이 불안설을 촉진시키는 큰 요인이 아닌지 잘 생각해 볼일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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