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 칼럼] 삐걱거리는 민주화 모범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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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우리나라의 현실은 왜 끊임없이 삐걱거리고 있는 것일까? 통합을 위한 구심력은 점차 약해지고 파편화로 향한 원심력만이 날로 강화되는 것은 어쩐 일인가? 지금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이 없기에 국민은 불안과 걱정에 시달리고 있다.

*** 국민 통합시키는 구심력 잃어

이번 추석연휴에도 우리 모두의 마음 한구석에 깃들인 불안의 그림자를 씻어버릴 수 없었던 것은 단지 엄청난 피해를 가져온 태풍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국민적 불안은 실패의 결과이기보다 성공의 산물이기에 그 증세가 더욱 특이한 것이 특징이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된 민주화의 모범국이다. 두 사람의 군 출신 전직 대통령을 재판하고 감옥에 보낼 수 있었던 나라, 두 사람의 정치인 출신 대통령이 재임 중 아들의 부정을 인정하고 감옥에 보내야 했던 나라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다.

지금 아무리 경제가 어렵고 사회가 혼란스럽다 해도 쿠데타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대통령을 민망할 정도의 직설적 표현으로 비판하면서도 예전과 달리 어느 누구도 권력기관으로부터의 보복을 걱정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우리는 민주화가 성공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민주화의 성공만으로는 그 이후의 안정이나 번영을 보장할 수 없다는 단순한 상황논리를 무시한 데서 오늘날의 위기와 불안을 자초한 것이다.

우리는 지난 시절 민주화에 골몰했던 나머지 민주화 이후의 어려움에 대비할 여유를 갖지 못했었다. 그에 대한 책임의 상당부분은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 지도자들, 특히 민주화를 주도했던 지도자들의 몫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의 책임을 논할 때가 아니다. 더욱이 민주화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자유롭게 선출한 집권자에게 모든 불안의 책임을 떠넘길 수만도 없다.

오히려 지금은 우리 스스로가 지난날의 무관심과 속단을 반성하고 진지한 논의와 타협을 통해 이 나라를 이끌어 갈 기본규범과 자세를 새롭게 정리해 봐야 할 시점이다. 우선 민주주의의 핵심인 '자유'와 '법'에 대한 국민적 인식과 합의의 도출이 시급하다.

그동안 우리가 민주화를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기본권을 소중히 여기고 이에 대한 조직적인 침해를 완강히 거부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 특히 권력에 의한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는 반드시 쟁취해야 되겠다는 의지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권위주의 시대가 지나간 이후의 민주화세력은 적어도 두 가지 차원에서 자유에 대한 국민적 열의를 지속시키는 데 그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첫째, 우리가 지켜온 자유사회는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지켜가겠다는 국민적 의지의 결집이다. 둘째, 북한체제의 성격을 평가하는 데 있어, 더 나아가 민족통일로 향한 청사진을 그리는 데 있어 자유와 인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얼마나 확실히 견지할 수 있느냐에 대한 국민적 합의다.

자유를 최우선시하는 국민적 입장이 확실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일관성 있는 외교.안보.통일정책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유'가 민주사회의 기본 가치라면 '법'은 기본 규칙이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만든 법을 무시하는 초법적 행동은 마땅히 반민주적 파괴행위로 규탄돼야 할 것이다. 민주국가는 모든 갈등을 법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자율적 승복'의 원칙에 대한 국민적 동의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에는 집단 이기주의를 앞세워 법을 우습게 보는 풍조가 만연돼 가고 있다. 이는 나라의 초석을 흔드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온 국민이 힘을 모아 지체없이 뿌리뽑아야 할 사안이다.

*** 자유.법 지키는 지도자 기다려

그러면 누가 이러한 역사적 과업을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인가? 총선을 앞둔 정치의 계절로 들어서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정당의 활동이나 경쟁에 개입하지 않고 초당적 입장에서 나라의 위기 극복에 전념할 뜻을 밝혔고, 박관용 국회의장도 총선 출마를 포기하고 의회민주주의 제도화에 앞장서기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들이 정말 마음을 비우고 안정된 국가운영의 기수가 되리라고 국민은 믿고 싶다. 자유와 법을 지키는 지도자를 불안한 국민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前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