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與猶堂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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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위대한 르네상스인이었던 다산 정약용(1762~1836)선생은 그가 살던 시대의 현실 정치인이었다. 젊어선 과거시험에 낙방하는 아픔을 겪었다. 뇌물받지 않고 살아가는 관료의 어려운 삶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가난(貧)'이란 시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하리란 말을 했건만, 막상 가난하니 안빈이 안 되네. 아내의 한숨 소리에 그만 체통이 꺾이고 자식들에겐 엄한 교육 못하겠네"라고 적었다.

하지만 다산의 진정한 고통은 사색당파 중 가장 큰 세력이었던 노론집단의 정치적 음해였다. 스물세살 때 천주교 비밀집회에 한번 참여했던 경력이 평생 그의 발목을 잡았다.

개혁정치에 박차를 가하던 정조대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지만 요직에 등용될 때마다 '천주교 경력'이 다산을 끌어내렸다. 그가 마흔살 때 발생한 정조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노론이 정적을 제거하는 절호의 찬스였다. 그들은 신유사옥(천주교 박해사건)을 일으켜 다산을 전남 강진으로 귀양보냈다. 유배는 17년이나 계속됐다.

신유사옥 직전, 노론의 숙청 칼날이 그를 겨냥해 한발한발 옥죄어 올 때 다산은 자신의 불안심리를 솔직하게 드러냈다.'여유당기(與猶堂記)'란 산문을 통해서다.

"내 병은 내가 잘 안다. 용감하지만 무모하고, 선(善)을 좋아하지만 가릴줄을 모른다. 이런 까닭에 어려서는 이단(천주교)으로 치달리면서도 의심하지 않았고, 삼십대에는 지난 일을 후회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없이 선을 좋아했지만 그 대가로 유독 많은 비방을 받았다. 아아, 그 또한 운명인가.(아니다)성격 때문이다."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처럼 운명을 들먹이며 억지 위안을 삼지 않았다. 그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기에 앞서 스스로 성격상 문제가 없었는가를 따졌다. 한없이 선을 추구한 것이 독선으로 흐르지 않았는지 반성했다. 다산은 자기 병에 대해 처방도 내렸다. "'노자(老子)'에 겨울의 찬 시냇물을 건너듯 망설이고(與),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겁낸다(猶)는 말이 있다. 이 두마디가 내 병에 약이 아니겠는가"라고.

다산 선생의 또 다른 호인 여유당은 이처럼 정치세계의 독한 체험에서 나왔다. 정치적 언행을 하기 전에 망설이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한번 더 생각해보라는 선인의 절절한 충고로 들린다.

전영기 정치부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