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 진통 마무리 "새 국정 결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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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해설>
노태우 대통령의 15일 광복절 경축사는 김일성과의 남북정상회담 제의와 더불어 현 시국에 대한 진단 및 올림픽 이후의 정국운영에 관해 노 대통령의 새로운 인식이 담겨져 있어 주목된다.
이번 남북한정상회담 제의는 취임 초부터 남북한관계의 개선에 직접 나서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집념이 농축되어 표현된 것이다.
장소·의제· 절차 등이 아무런 장애요인이 될 수 없다고 밝힘으로써 북한측이 원하면 평양 또는 제3국이라도 가고 불가침선언·군축 등 고도의 민감한 문제들까지 다를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과거 전두환 대통령의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 회담(81·6·5) 제의가 정상간의 만남을 통한 상호불신해소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노 대통령의 이번 제의는 북한을 적대시하지 않겠다는 7·7 선언을 바탕으로 만나서 곧바로 화해와 공동 번영문제를 논의하자는 데 특징이 있다.
북한이 앞으로 어떤 태도로 응해올지 미지수이지만 노 대통령은 이번 제의를 통해 새로운 광복의 과제를 평화통일로 설정하고 마치 동서독의 정상들이 상호방문(70년)을 통해 양 독 기본조약을 체결했듯이 남북한정상들이 구체적인 결실을 위해 만날 것을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경축사를 통해 노 대통령이 진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대북 제의보다 국내문제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것 같다.
노 대통령은 취임 후 주장해온 낙관적 정세 관에서 일보 물러나 현재의 시점을 도전과 기회를 함께 지닌 분수령으로 규정하고 여기서 잘못하면 혼란과 분열·퇴보의 길로 떨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는 취임 후 벌어진 일들이 역사진전의 과정이냐 호들이냐, 전환기적 갈등이냐 혁명적 상황이냐는 문제에 부닥쳤을 때 항상 긍정 쪽에 섰던 그의 인식에 상당한 변화가 일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나아가 「폭력혁명으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여 계급독재체제를 세우겠다는 세력과 욕구와 갈등의 무분별한 분출로 애써 이룩한 민주주의의 틀을 위협하고 있는 사회일각의 현상」을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단정하고 단호한 대처의지를 표명했다.
사실 노 대통령은 지금까지 국민의 뜻에 순응한 6·29선언의 위대성, 그로 인한 정통성시비의 해소와 권위주의 청산에 집착한 나머지 민주화의 부작용에 대해선 지나치게 관대하게 대처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을 여권 내부에서부터도 받아왔다.
공권력은 국민이 요청할 때 사용해야 효과가 있고 장기집권·부패 등 구조적인 문제만 자계하면 좌경문제는 국민이 나서서 막아줄 것 아니냐는 것이 대통령의 인식이었던 것 같다.
심지어 백가쟁명은 민주화 과정이란 것이 노 대통령의 인식인 것처럼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새 정부가 출범한지 6개월 동안의 경험, 그리고 올림픽을 한달 앞둔 사정으로 볼 때 지금까지의 인식과 정국운영방식은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이제는 직선대통령으로서의 비전제시보다는 문제해결 능력이 더 요청된다는 것을 절감한 듯하다.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행위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올림픽을 방해하는 행위는 어떤 명분으로서도 용서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이제 전환기는 끝내고 허용되는 선과 안 되는 선을 분명히 긋고 나가겠다는 의지를 시사한 것 같다.
노 대통령은 경제문제에 관해서도 지금까지와는 다소 궤를 달리하는 언급을 했다. 즉 「경제의 성장도, 균형 있는 배분도 노사의 협조와 산업의 평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전체의 몫을 키워가면서 커지는 몫을 균형 있게 배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대목에서 그 차이를 감지할 수 있다.
분배문제로 소외계층이 생기면 사회에 혼란이 오고 사회가 혼란하면 경제가 침체되니 민주화추진을 위해서는 분배문제에 우선 신경을 써야한다는 종래의 주장이 다소 후퇴한 감이 든다. 노사분규는 결국 성장의 장애요인이며 파이를 먼저 키우는 일이 분배를 보장한다는 논리로 회귀한 듯 하다.
이렇게 볼 때 올림픽 후 노 대통령의 정책목표는 좌경·용공세력에 대한 단호한 대처, 각종 욕구분출 현상에 대한 공권력의 엄정한 행사, 경제불안 요인에 대한 현실성 있는 처방에 우선 순위를 둘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민주주의의 틀을 둘러싼 전환기적 진통의 시기를 끝내고 국정을 민주질서 정착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 노 대통령의 구상인 것 같다.

<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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