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빨리 찾아온 집권경쟁 정국|송진혁<논설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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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무더위 속의 요즘 정국기류를 보면 지금이 정권의 임기 초인지, 임기 말인지 어리둥절하게 되는 현상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임기후의실시를 전제로 하는 개헌론이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터져 나오고, 선거운동에 방불한 지지기반확대작업·이미지 관리작업이 무더위 에 아랑곳없이 여러 가지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개헌론도 내각제개헌론뿐 아니라 다음 대통령선거부터는 과반수득표자가 없을 경우 1, 2위 득표 자 끼리 결선투표를 하자는 개헌론도 등장했다.
3김씨를 비롯한 각 정당대표들이 미국으로, 일본으로, 필리핀으로 경쟁하듯 해외여행에 나서고 증권거래소다, 전방이다, 교도소다 하면서 마치 선거 전 개막직전처럼 바쁘게 움직인다.
김대중씨는 동해안에 휴가를 가서까지 기자회견을 했고, 김영삼씨는 공청회·세미나 등을 통해 새 이미지조성에 안간힘이라는 얘기다.
내각제 논의과정에서는『내각제아래서는 연정에 참여할 용의가 있다』『내각제는 변칙적인 집권연장기도다』라는 말도 나왔는데 5년 후의 연정을 지금부터 말하는 까닭도 잘 알 수 없거니와 이제 6개월 된 정권내부에 벌써 집권연장기도가 있다는 얘기도 놀랍기 짝이 없다.
이처럼「노 정권 이후」를 겨냥한 정치포석과 움직임이 활발하다. 야당지도자들도 대체로 올림픽 후에 있을 노 대통령의 재 신임문제를 정권교체의 기회로 몰아갈 생각이 없는 것으로 들리는데 그렇다면 이런 움직임은 92년 또는 93년을 대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선거를 치른 지 이제 8개월, 새 정부가 출범한지는 고작 6개월이라는 사실을 새삼 따져 보면 때는 아직 임기초가 분명한데 정국은 임기후반기의 양상으로 줄달음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국은 벌써 4년 후를 달리는 셈이다.
내각제논의는 민정 당이 발설자인 윤길중 대표위원의 주장을「사건」처리함으로써 일단 진정됐지만 민정 당이 내각제자체를 반대하기보다는 오히려 윤 대표 발언으로 내각제추진에 지장이 있을까 봐 우려하는 것이 확실히 드러남으로써 올림픽만 끝나고 보면 내각제개헌론은 더욱 본격화하고 그에 따라 정국의「차기현상」도 더 가속화되지 않을까 하는 전망이다.
우리정치인들이 이처럼 심모원려 를 갖고 멀리 내다보는데 대해서는 탄복을 안 할 수 없지만 마음한구석에 정치가 이런 식으로 굴러가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정치인이 집권을 목표로 늘 국민인기를 생각하고 끊임없이 지지기반을 넓혀 나가는 노력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국이 차기집권 경쟁만 염두에 두는 만성적인「취기현상」으로 가서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다. 우선 정치의 원칙과 일관성이 떨어지고 영기 연합의 정치 행 태가 나오게 된다. 벌써 그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지나치게 표를 생각하다 보면 이쪽에도 좋게 말하고 저쪽에도 인심을 잃지 않으려는 엉거주춤한 양다리 걸치기가 되기 쉽고, 여론을 형성하고 이끌어 나가기보다는 여론에 영합하고 편승하는 정치가 되고 만다.
보수 층의 지지도 받고 급진세력과도 찰 지낸다는 정치가 과연 가능한 것인가. 그러다 보면 일관성도 원칙도 없어지고 그런 정당이나 정치인의 입장은 중요한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어 정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최근 야당들이 대북한창구의 정부일원화를 인정하고서도 8·15학생 회담을 지지하고, 학생들의 폭력시위로 국민우려가 높아도 정치권에서 꾸지람 한번 안 나오는 것이나, 올림픽의 초당적 협력을 다짐하고서도 정치휴전에는 명쾌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이 다 그런 예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런 정국에서는 현실의 문제해결에 소홀해지는 현상도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표를 의식한 인기품목에만 집착하다 보면 현실의 진정한 문제를 외면하거나 건성으로 넘어가는 현상이 올 수밖에 없다. 가령 요즘 가장 인기품목이라 할 수 있는 5공 비리문제 등에 관해서는 각 정당이 서로 질세라 당 력을 집중하고 있지만 최근 심각해진 부동산 문제 같은 경우 뒤 북을 쳤다고 비판받는 정 내 집 마련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데도 지난 선거 때 그토록 서민복지를 외치던 정치인이 왜 정부를 닥 달해서 뒷 북 아닌 앞 북을 치도록 하는 노력을 못했는가.
뿐만 아니라 최근 경제정책의 기조가 안정이냐, 복지냐의 기로에 서 있고 이것이 앞으로 국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텐데 도 정치권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있었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이처럼 인기와 표만 생각하는 나머지 바로 몇 달 전의 선거공약도 잊은 채 새로 표 얻을 인기품목의 개발에만 열중한다면 정치의 현실문제 해결능력은 안 떨어질 수가 없다.
현실 문제에는 무능하면서 지지기반을 넓힌다고 해봐야 얼마나 넓힐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진정한 인기나 지지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저런 점을 두루 생각 할 때 13대 초 정국「13대 후 정국」화는 너무 이르기도 하려니와 바람직하지 못한 점이 많다. 정치인들이 취기를 노리되 원칙과 일관성을 가지고 현실의 수많은 문제를 풀어 가면서 나름대로 수준과 능력과 성향의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국민지지를 경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오늘날 인기품목이 아니더라도 정치의 해결을 기다리는 우리사회의 문제가 어디 한두 가지인가.
요컨대 정치를 집권전략의 차원에서만 생각할게 아니라 국가운영이나 국민 이익차원에서 생각해야 하며 최소한 그런 명분이라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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