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Story] 자기 점검 나선 산업은행의 '역발상 워크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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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0일 미사리 산업은행 연수원에 김창록 산업은행 총재와 부장급 이상 임직원 전원이 모였다. 이날부터 나흘간 이어진 '산업은행 혁신 워크숍'을 위해서다. 워크숍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산업은행이 망하는 시나리오'라는 집단 토론 프로그램. 김 총재가 직접 주재한 이 프로그램에서 임직원들은 팀을 나눠 '이렇게 하면 산업은행이 망한다'라는 상황을 설정하고 토론을 시작했다. 예정은 오후 10시까지였지만 뜨거운 토론이 이어지면서 대부분 팀이 자정을 넘겼고 일부 팀은 오전 1시30분에야 마쳤다.

◆ "망하는 건 시간문제?"= 새로운 시장 개척 없이 기존 업무에만 집착하려는 안이한 조직문화를 비롯해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적당주의 ▶전문성보다는 평등을 강조한 순환인사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제가 조직문화를 해친다는 생각 ▶고객보다는 조직의 편의를 먼저 생각하는 것 등이 산업은행을 망칠 주범으로 지목됐다.

이런 것들을 놔두면 '고객 이탈→우량 자산 감소→부실 자산 증가→수익 감소→직원 이탈→조직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임원은 "이런 요인들이 산은 내에 계속 남아 있으면 우리는 불을 지핀 솥 안의 개구리 신세가 될 것"이라며 "처음엔 고통을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끓는 물에 목숨을 잃게 된다"고 말했다.

문제가 파악되면 해법도 나오게 마련. 해외자원 투자와 개발금융 노하우 수출 등으로 블루오션을 개척하고 ▶유능한 인력을 현업에 우선배치 ▶시급히 필요한 전문인력은 아웃소싱 ▶중점 육성분야를 선정해 인력.예산 집중 ▶타은행과 전략적 제휴 등 업무 공조체제 강화 등의 아이디어가 모였다.

한 실장급 간부는 "52년의 산은 역사 동안 부장급 이상 임직원 전원이 외부 워크숍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가상 시나리오로 산업은행의 현실을 점검하고 나니 긴장감이 더했다"고 말했다.

다음날 오전 열린 총평에서 김 총재는 "산은이 망한다는 부정적 시나리오를 반면교사로 삼아 새로운 발전방향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라며 "급변하는 주위 환경에 맞춰 조직과 개인 모두가 변화에 보다 빠르게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진지한 고민이 시작됐다"=지난해 산업은행은 2조4217억원의 당기순익을 내 역대 최고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산업은행을 둘러싼 여건은 이 같은 실적을 무색케 한다. 기업들이 돈을 쌓아놓고 있는 실정이라 정책 자금을 나눠준다는 본래 기능이 크게 준 데다 시중은행들과 경쟁하는 영역이 넓어지면서 아예 '국책은행 무용론'마저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이런 분위기 때문에 최근 일부 젊은 직원이 회사를 떠나기도 했다"며 "산은 개혁을 위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최근엔 전 산업은행 부총재가 돈을 받고 공적자금이 들어간 회사의 부채를 깎아 준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이를 보는 금융권의 시각도 곱지 않다. 한 관계자는 "국책은행은 일반은행에 비해 더 높은 잣대와 도덕성 등 공공성이 요구된다"며 "이를 은행 본연 업무인 수익성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열쇠"이라고 말했다.

최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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