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40년 재조명<2>|정치인이 「민주 행보」못 따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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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6월15일 민방위훈련이 실시되던 오후, 붉은 두 줄을 그은 통행증을 부착한 국회의원들의 검은 세단들이 마포에서 여의도로 줄을 이었다.
모든 시민과 차량이 대피 중이었던 관계로 의원차량들의 행렬은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 오후 2시 본회의에 참가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날 회의는 여야간 상임위원장 배분에 대한 이견으로 정시에 열리지도 않았다.
세월이 엄청나게 변했는데도 국회의원들은 여전히 일반의 탑승절차를 밟지 않고 꼭 귀빈실을 이용하여 비행기를 타고 있다.
빈민대표·농민대표·재야인사가 대거 참여한 13대 국회에서 이러한 특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일반시민과 같이 줄을 서서 비행기를 탄 국회의원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고문치사사건·6월 투쟁 등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구성된 13대 국회의 행태로만 보면 뭐가 민주화되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여야가 말로만 민주주의를 떠들었지 정치인들의 행태는 권위주의의 폐습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는 듯하다.

<권위주의의 연속>
한국정치의 권위주의가 어제오늘의 현상은 아니지만 이런 권위주의 때문에 우리 정치의 고질적인 낙후성이 좀처럼 씻어지지 않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정치 행태가 권력중심으로 이뤄지고 그로 인한 권력의 집중화와 지도체제의 과소화 현상이다.
여당의 정치에서는 항상 당정간의 갈등이 문제다. 정치가 당 중심으로 이뤄져야 하지만 대통령의 권한 때문에 행정부의 눈치를 보게 되고 자칫하면 행정중심의 정치가 이뤄지게 된다. 과거 공화당이 그러했고 민정당 처지 역시 별로 나아진 게 없다.
이런 권력집중현상은 야당이라고 나을게 없다. 공천권을 쥔 당수의 카리스마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성향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현재의 평민·민주·공화당은 김대중·김영삼·김종필 3김씨의 개인적 카리스마에 의해 지배되는 1인 정당이다.
권위주의로 말미암은 또 한가지 병폐가 정당구조를 취약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해방직후 수백 개가 등장했던 정당들의 부심은 두고라도 그이후의 자유당·공화당 등 집권당이 정권과 함께 영락해버렸고 야당의 경우도 정권의 탄압이 이합집산의 큰 원인이긴 했지만 최근 신민당에서 민주당이, 또 민주당에서 다시 평민당이 핵분열한 과정도 권위적인 인물중심의 우리 정당의 현실을 반증하는 좋은 예다.
정당이 이처럼 국민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권력과 인물을 좇아 성쇠를, 거듭하는 한 정치의 진정한 발전을 기약하기는 어렵다.

<무한투쟁 악순환>
우리 정치의 또 한가지 큰 문제는 명분주의다.
지난날 권위주의적 통치가 정상적인 정치를 어렵게 만든 측면도 있지만 명분에 집착하는
정치가 현실노선, 타협과 대화의 정치를 어렵게 만들었다.
해방직후 좌우파의 대결이 정치를 이념으로 갈라놨고 그 이후 여야간의 관계에서도 사쿠라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점도 그 단적인 예다.
명분주의는 각자가 내세우는 명분이 있는 만큼 결코 져서는 안 된다는 무한투쟁을 전개한다.
철저한 승리나 패배만이 있을 뿐 타협론자는 기회주의나 사쿠라로 몰리게 마련이다. 이 같은 완승주의·흑백논리 때문에 언제나 강경파가 득세를 하고 그들의 행동은 충성과 용기로 비쳐진다.
민주주의 정신의 요체가 타협과 협상이라는 사실로 볼 때 이러한 우리 정치의 명분주의는 민주주의 실현의 큰 장애물이다.
명분에 집착하다 보니 정치가 채워야할 실제 내용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국회가 걸핏하면 절차문제로 공전하는 것, 민생문제가 항상 뒷전으로 내몰리는 점등도 그런 연유다.

<외세지향도 문제>
개개 정치인의 의식수준도 문제다.
국회에서는 여전히 인신공격이 난무하고 허황된 웅변조 연설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외세지향도 고질병 중 하나다. 지난7월 미 민주당전당대회와 8월의 공화당전당대회에 한국의 정치인만이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참관하는 것도 별로 보기에 좋은 것은 아니며 해외에 나가서 발언을 해야 먹힌다는 의식 때문인지 여야 대표가 경쟁적으로 나들이를 하거나 계획하고 있는 것도 우리 정치풍토에서만 볼 수 있는 현실 같다.
워싱턴과 동경의 정객들에게 면담을 구걸하기 위해 줄을 서거나 주한대사관의 참사관이 불러도 몰려가는 정치인들도 없어져야 할 유산이다.

<대화의 묘 살려야>
반대한다는 명분하나로 버티어 오던 야당은 이제는 떳떳이 긍정을 하고도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여당도 힘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해 과거의 절대다수의석 시절만을 그리워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얘기하듯 황금분할의 여소야대 구조하에서 진정한 타협과 대화의 정치를 해 나가야할 때다.
건국40년 동안 시련을 겪을 만큼 겪었다.
80년 봄의 좌절이후 2·12총선, 6월 항쟁 등을 거치며 외형적인 민주화는 이뤄져 가는 듯했다.
결국 보다 높은 수준의 정치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정치를 가능케 하는 토양으로서 국민의 정치의식수준이 문제가 될밖에 없다.
지난 총선에서 보았듯 국가를 분열시킬 지경의 지나친 지역감정, 돈이 더욱 판치는 선거풍토 등은 자칫하면 정치의 큰 모습을 비뚤어지게 만들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국회의 특위활동·통일문제 등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이 팽만하고 있다. 그만큼 균형 있는 정치의식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인 것 같다.

<문창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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