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이민법 시위 주도 … 정치적 영향력 확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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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미국 워싱턴에서 벌어진 이민법 항의 시위에서 한 히스패닉 여성이 '우리는 미국'이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있다. [워싱턴 로이터=뉴시스]

미국에서 히스패닉(Hispanic)의 정치적 파워가 빠르게 커지고 있다. '라티노(Latino)'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중남미 출신 이민자나 그 후손을 가리킨다. 이미 4000만 명을 넘어 미국 전체 인구(거의 3억 명)의 13%를 차지한다. 2년 전 흑인 인구를 제쳤다. 이들 중에는 불법체류자도 많다.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인 이들은 낙태를 반대하기 때문에 인구 증가율도 단연 높다. 계속되는 이민자 유입과 높은 출산율로 인해 2020년이 되면 6000만 명을 넘을 것이라는 전망도 이미 나와 있다.

특히 뉴멕시코(히스패닉 비율 42.1%), 캘리포니아(32.4%), 텍사스(32%), 애리조나(25.3%), 네바다(19.7%)주 등은 이들이 없으면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라티노의 비중이 크다. 이런 히스패닉이 최근 단결력을 과시하고 있다. 불법이민자를 죄인으로 몰아 처벌하겠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센센브레너 법안이 지난해 말 하원을 통과한 것이 계기가 됐다. 반(反) 이민법으로 불리는 이 법안을 규탄하기 위해 10일 워싱턴.뉴욕.휴스턴 등 70여 개 도시에서 열린 집회는 사실상 히스패닉들의 행사였다고 미 언론들은 전했다. 이들은 평화를 상징하는 흰색 티셔츠로 복장을 통일해 단합된 힘을 과시했다.

이날 10만여 명(경찰 추산)이 모인 워싱턴의 미 의회 앞 내셔널몰은 흰색 물결로 넘쳐났다. 사회자는 스페인어와 영어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우리는 미국이다(We are America)" "우린 범죄자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노(No) 센센브레너 법안"이라고 외칠 땐 함성이 더욱 커졌다.

워싱턴 지역 호텔.식당업 히스패닉 노조 간부인 라파엘 로페스(39)는 "1985년 엘살바도르에서 밀입국했다가 8년 만에 시민권을 얻었다"며 "이민자의 나라에서 이민자를 범죄자로 취급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우리가 없으면 누가 이 나라의 화장실과 길을 청소하고, 빌딩과 다리를 세우겠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시민권을 가진 히스패닉 가운데 유권자로 등록한 경우는 고작 41%다. 로페스는 "5월 1일엔 모든 히스패닉이 파업을 한다"며 "그날 미국은 우리의 힘을 확실하게 느끼게 될 것이며, 11월 중간선거에서도 그걸 실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워싱턴 집회에 참석해 이민자를 적극 옹호하고, 기자들에게 "이건 시민운동의 부활"이라고 말한 까닭은 히스패닉의 정치적 힘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상당수 공화당 상원 의원이 센센브레너 법안을 반대하는 것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한 히스패닉을 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워싱턴 집회엔 한인 100여 명도 참석했다. 하지만 히스패닉이 인산인해를 이룬 상황에서 한국 교민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해양기상청에서 일한다는 권오윤(51)씨는 "미국에서 30년을 살았지만 히스패닉의 응집력이 이렇게 큰지 몰랐다"며 "의회가 그들의 목소리를 함부로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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