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오 평양 떠난 직후 靑에 걸려온 백악관 전화…文 "판문점" 기대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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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ㆍ미 정상회담 장소와 시간을 공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트위터

북ㆍ미 정상회담 장소와 시간을 공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트위터

북ㆍ미 관계 사상 처음으로 열리는 정상회담의 장소가 싱가포르로 낙찰되기까지 한국ㆍ미국ㆍ북한의 ‘담판 장소 설득전’이 계속됐다. 결과적으론 백악관이 선택한 제3국(싱가포르)으로 결정됐다. 판문점의 한국, 평양이라는 북한, 제3국이 낫다는 미국의 생각에는 남ㆍ북ㆍ미 3국의 전략적 판단이 깔려 있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11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지난주 워싱턴에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만났을 때 6월 12일,13일 무렵의 싱가포르라고 통보받았다”고 밝혔다. 정 실장은 지난 4일(현지시간) 백악관을 찾아 볼턴 보좌관을 만났고 이후 북ㆍ미 정상회담 장소와 시기에 대해 “미국과 북한이 결정하면 존중할 것”이라고만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ㆍ미 정상회담 개최지로 싱가포르를 알렸다. 사진은 회담 장소 중 하나로 거론되는 싱가포르의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모습. [중앙포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ㆍ미 정상회담 개최지로 싱가포르를 알렸다. 사진은 회담 장소 중 하나로 거론되는 싱가포르의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모습. [중앙포토]

 하지만 청와대는 이후에도 상황은 여전히 유동적이라고 봤다. 정 실장 방미에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가졌다.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다음날이다. 이 통화에서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판문점과 싱가포르를 놓고 북ㆍ미 정상회담 장소를 논의했다고 한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사실상 두 곳을 놓고 장단점을 논의했다”며 “가장 많은 대화를 했던 곳이 판문점이었고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많은 질문을 한 곳도 판문점이었다”고 알렸다. 당시 통화에선 인천 송도가 거론됐지만 “그냥 언급이 됐던 정도였고 대화에서 진전이 안 돼 거의 (언급이) 없는거나 마찬가지”라고 핵심 관계자는 소개했다.

지난달 27일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던 판문점 평화의집.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화의 집 앞에서 '판문점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공동기자단

지난달 27일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던 판문점 평화의집.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화의 집 앞에서 '판문점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공동기자단

 트럼프 대통령은 며칠후 트위터에 “판문점이 제3국보다 나을까”라는 질문을 올리며 판문점 선택 가능성에 불을 당겼다. 청와대가 반색했던 것은 물론이다. 문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판문점을 더욱 각인시키는 효과를 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청와대는 정 실장이 볼턴 보좌관을 만나 싱가포르라고 듣고 온 이후에도 장소와 시기가 변경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여기엔 북ㆍ미 정상회담의 당사자인 북한이 싱가포르보다는 판문점이 덜 부담스러워 할 것이라고 본 것도 있다.

 회담 장소를 놓고 벌어진 마지막 변수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9일 방북이었다. 청와대는 폼페이오 장관이 평양에서 있으면서 정상회담의 시점과 장소가 최종 확정될 것으로 봤다. 당국자들이 이 방북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이유다. 폼페이오 장관이 미국인 억류자 3명을 데리고 평양을 떠난 직후 청와대엔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고 싶어한다는 백악관의 연락이 왔다. 이날 밤 통화는 당초 청와대와 백악관이 사전에 준비한게 아니었다. 청와대 일각에선 백악관에서 통화 요청이 오자 예정에 없던 통화 요청인 만큼 혹시 판문점으로 바뀌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도 일었다. 그러나 통화에선 “판문점의 ‘판’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청와대가 판문점을 권고했던 이유는 판문점의 상징성 때문이다. 정전협정 장소에서 북한과 미국 정상이 다시 만나는 자체가 냉전의 마지막 잔재인 분단 체제의 종식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북ㆍ미 정상의 첫 만남을 한국이 중재해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이 자연스레 부각되는 계기도 된다고 봤다.

대동강이 흐르는 평양 시내의 모습. 채병건 기자

대동강이 흐르는 평양 시내의 모습. 채병건 기자

 북한은 당초 평양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을 평양으로 부르기를 원했고 폼페이오 장관의 1차 방북 때 미국인 억류자 석방을 시사하며 평양 개최를 희망했다고 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선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주도하는 나라로 비난해온 미국의 ‘최고 존엄’이 평양에 오는 게 사실상의 북한 체제 인정으로 간주되는 효과를 얻는다. 트럼프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을 밟는 순간 사실상의 ‘김정은 체제 인정’이 될 수 있다. 또 북한 내부적으론 미국과 맞서 나라를 지키다 미국 대통령이 ‘우리 땅’을 밝게 만든 ‘절세의 지도자’로 김정은을 부각하는 정치 선전의 계기가 된다.

하지만 백악관은 평양을 일치감치 선택에서 배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신 판문점에 관심을 보였지만 백악관 참모와 주요 각료들은 판문점을 반대했다. 북한이 비핵화 약속을 실제로 이행할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판문점을 찾는 게 미리 선물을 줘버리는 모양새인 데다 문 대통령과 김정은이 먼저 만났던 판문점을 미국 대통령이 뒤이어 따라가는 모양새를 연출하는 게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정부 당국은 보고 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당초 고려했던 제3국으로 낙점했다.

 당초 미국 측은 싱가포르보다는 제네바를 더 선호했다고 한다. 하지만 항공기의 이동 거리 등이 감안됐다. 스위스 제네바 보다는 동남아시아의 싱가포르가 김정은을 태운 전용기가 운항하기에 더 용이한 거리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지난 9일 두 정상간 통화가 이뤄졌을 때 저로서는 판문점을 북ㆍ미 회담 장소에서 배제한 데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약간의 미안함이 있는 것으로 느꼈다”고 말했다.

채병건 기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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