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DNA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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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983년 영국의 한 시골에서 15세 소녀가 성폭행 당한 변시체로 발견됐다. 오리무중인 가운데 3년 후 같은 마을에서 15세의 소녀가 같은 식으로 살해됐다.

얼마 뒤 경찰이 17세의 소년을 체포했고, 두번째 사건의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첫번째 사건의 범인일 가능성이 있다며 유전학자 앨릭 제프리스에게 유전자 감식을 요청했다.

병에 걸린 사람과 건강한 사람의 유전자 차이를 연구해 온 제프리스는 인간의 DNA 구조가 99.9% 같지만 특정부분에서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고유의 무늬라는 점에서 'DNA 지문(指紋)'이라 불렀다. 이 구조가 부모로부터 절반씩 물려받은 유산이며, 핵을 지닌 모든 세포에서 똑같이 드러난다는 점도 확인했다.

제프리스는 두 피살자의 몸에서 발견된 정액에서 범인의 DNA 지문을 찾아냈다. 두 사건은 동일범의 소행이며, 소년은 범인이 아니었다. 경찰은 그 동네 모든 젊은이의 DNA 지문을 검사해 25세의 진범을 체포했다. DNA 지문이 잡은 최초의 범인이다.

웟슨과 크릭이 케임브리지의 한 선술집에서 DNA의 구조발견을 선언한 지 33년 만이다. 이들이 노벨상을 받을 당시 노벨상위원회는 "적어도 당분간은 전혀 쓸모 없는 연구성과"라 평가했다.

그 당분간은 결코 길지 않았고, 그 쓸모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DNA구조가 확인되자 유전학자들은 각 부분의 고유기능을 모두 찾아냈다. 기능별로 따로 떼어내는 분리기법, 그 기능을 조작하거나 대체하는 기술까지 개발해냈다.

DNA 지문이 과학수사의 새 장을 열고 11년 만 인 97년 복제양 돌리가 태어났고, 다시 3년 뒤인 2000년엔 인 간 유전자 지도 의 초안이 완 성됐다. 최근 한 종교집단은 인간복제에 성 공 했다고 주장한다. 19세기까지 종교의 영역에 속했던 생명의 신비가 무 생물인 분자들의 배열로 대 치 되 고 , 인간의 운명이 화학적으로 예측되는가 하더니 급기야 인간이 인간을 재창조하는 시대가 다가온 셈이다.

아무리 분자생물학의 시대라지만 영국 경찰이 전국민의 DNA 지문 등록을 추진한다는 소식은 지나쳐 보인다. 정보를 장악하고 개개인을 감시하는 권력,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Big Brother)'가 과학수사란 이름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따뜻한 고향이 더 그리운 이역만리의 한가위 살풍경이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