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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치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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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동유럽 국가 크로아티아의 스티페 메시치 대통령이 5일 방한했다. 인구 440만 명의 작은 나라 지도자지만 유럽에선 '사과와 화해'의 주역으로 존경받는다. 다른 나라에 과거 역사의 잘못을 사과하고 화해하는 데 앞장서 왔기 때문이다.

그는 두 나라의 대통령에 오른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1991년엔 크로아티아.세르비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6개 공화국으로 이뤄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마지막 대통령을 맡았다. 35년을 통치한 요시프 티토 대통령이 80년 세상을 떠난 뒤 공화국 대표들이 1년씩 돌아가며 맡은 자리다. 하지만 곧 연방이 무너지고 공화국 간 내전이 벌어지면서 그는 경륜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물러났다.

메시치의 숨은 진가는 2000년 2월 크로아티아 대통령이 되면서 발휘됐다. 그해 8월 미국을 방문하면서 가장 먼저 워싱턴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찾았다. 41년 4월부터 45년 5월까지 크로아티아를 통치한 친나치 우스타샤 정권이 '국민의 피를 순수하게 한다'며 수십만 유대인과 집시를 나치 수용소로 보낸 것을 사과하기 위해서다. 이듬해 10월엔 이스라엘을 찾아 과거사를 또다시 사죄하고 용서를 구했다. 학살에 가담했다가 해외로 도주한 크로아티아인 전범의 소재를 알려주기도 했다.

그의 사과 외교는 2003년 9월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찾으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내전을 벌여 수만 명의 희생자를 냈던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서로 사과하는 극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어 일부 국민이 영웅시하던 내전 당시 군사 지도자들의 전쟁 범죄를 단죄했다. 극우 민족주의 단체의 암살 위협과 내전 참전 군인들의 시위가 있었지만 메시치는 신념을 지켜 '사과와 화해'를 계속했다.

그런 메시치를 지켜보던 유럽연합(EU)은 크로아티아를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인정해 회원 가입의 길을 열어줬다. 크로아티아는 2009년 EU 회원국이 될 예정이다.

그는 1월 초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전쟁과 갈등을 겪었기에 평화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용기 있게 과거사를 사과한다. 그것이 화해의 미래로 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그런데 그 유일한 길을 일본만 모르는 건 아닐까.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총리가 참배하는 문제 등에 강하게 대응하는 한국의 정책을 '레임덕을 피하기 위한 국내 정치용'이라고 외무성 내부 보고서에서 가치 절하한 그 나라 말이다.

채인택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