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된 통일논의「7·4공동성명」16주를 맞아 재조명한다(1)평양밀행…「통일3원칙」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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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남북학생회담 움직임을 신호로 통일문제가 국민적 관심의 전면에 떠올랐다.
온 나라가 통일논의의 열기에 휩싸여 있고 정부도 종래와는 다른 시각에서 통일논의를 개방하고 있다.
몇년간의 잠에서 갑자기 깨어난 통일논의여서 엇갈림으로 보이는 다양성은 필연적이다. 그렇지만 통일문제를 보는 세대간의 단층은 많은,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학생들의 통일논의는 정부당국은 물론 기성세대의 종래의 자세가 비타협적이었다는 불신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들은 남북간의 통일논의가 진전되지 않고 있는 구조적 원인을 한꺼번에 뛰어 넘을수 있다고 믿는듯이 보인다. 이런 흐름은 북한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을 경험한 세대들에겐 충격이다.
6월의 마지막 주간에 행해진 4당 대표연설에서 4당은 통일논의의 폭넓은 개방엔 인식을 같이 했지만 학생들의 접근방식에 대해선 얼마쫌 시각차를 보였다.
학생을 포함, 다양한 각계의 통일논의에 정부나 여야 정당들이 효율적으로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한가닥 불안이다.
그렇지만 여야정당들이나 사회 각계는 열의만으론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기 어려운 남북문제의 얽힌 가닥들을 알고 있다. 실제로 남북관계의 개선이나 통일은 어렵고도 먼 길임을 경험은 가르치고 있다.
남과 북은 불신하고 증오하고 적대시하는 가운데 대결을 지속해 왔다. 남과 북은 불안한평화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단속적이긴해도 줄곧 계속해 왔다.
이 같은 노력들중 통일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한 실질적 정치협상은 72년의 7·4남북『공동성명에서 출발했던 1년여의 남북조절위원회다.
물론 그 이후에도 간헐적 접촉이 있기는 했지만 그 어느 것도 그 때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남북조절위원회도 통일3원칙의 합의선에 머물렀다. 이 회담에서 나타난 것은 서로가 전쟁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한다면서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타협안을 마련하는 것이 지난한 과제일 수밖에 없는 쌍방의 거리감이다.
실패한 협상과정은 남북문제해결을 가로막고 있는 요인들을 보여주고 있다.
7·4공동성명 16주년을 맞아 당시의 상황을 재정리하여 통일문제에 대한 바른 시각의 정립을 모색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한마디로 7·4공동성명이 남긴 것은 자주·평화·민족대다결이라는 통일3원칙이다. 이 3원칙이 마련됨으로써 서울과 평양이 서로 개방됐다. 판문점에서 열리고 있던 남북적십자회담, 그리고 남북조절위원회의 대표단·자문위원·기자단이 서울과 평양을 번갈아 내왕함으로써 6·25전쟁으로 만들어진 근세사상 가장 처절한 분단의 벽을 뚫었다. 그러나 대화는 어느날 갑자기 끊어졌다.
결과적으로 2년간으 조력은 통일3원칙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물론 통일3원칙은 남북관계 개선의 기본지침으로 지금도 흔들림이 없다는데서 그 가치는 높다. 문제는 3원칙 그 자체의 해석에서조차 나타난 쌍방간 인식의 차이다.
통일3원칙은 평양을 밀행한 이후락정보부장과 김일성의 두 차혜 회담에서 만들어졌다. 미 비밀회담이 이루어지기까지에는 꼬박 반년의 비밀접촉을 거쳐야 했다. 사전회담은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단중의 실질적 실무대표였던 남의 정홍진과 북의 김덕현 단둘만의 비밀접촉으로 시작되었다.
두 실무대표는 11차례의 회담 끝에 고위회담을 열기 위한 두 대표의 교환방문에 합의했다.
정홍진이 먼저 평양을 밀행하고 그 20일후 김덕현이 서을을 다녀갔다. 실부대표의 내왕이 성공한 뒤 남북당국 최고책임자의 신임장으 휴대한 대표의 교환방문이 이루어졌다.
이후락부장은 72년5월2일 평양길에 올랐다. 정홍진과 두경호원을 대동한 이부장은 개성에서 북의 헬리콥터로 평양에 갔다. 이부장은 정홍진과 함께 평양쪽의 김영주 (김일성실제·당시당조직지도부장)·김중린·유장식·김덕현과 두차례 회담했다.
이 회담은 북쪽 체제의 경직성을 보여주었다. 첫날 회담에서 북쪽 대표단은 이부장의 의견개진을 요구하고 거의 듣기만 했다. 그들은 이부장의 제안에 대해 그들의 대답은 하지 않은채 질문하거나 이따금 해명발언만을 했다. 예를들어 이부장이 폭넓은 교류를 역설하면서 『오해와 불신이 있었다. 이를 극복하고 신뢰를 회복하기위해 교류가 필요하다』고 했을 때 북쪽 대표는 『오해와 불신에 대해 말씀하십시오』라고 했다.
이부장은 6·25전쟁을 상기시켰다. 이에 대해 북쪽대표는『6·필전쟁에 대해 말씀했는데 그점 나중에 얘기 합시다』라면서 왜 미군철수를 반대하느냐고 역습했다. 이부장은 『미군을 불러들인 것이 당신들이다. 나가게 하는 것도 당신들 책임이다』라고 설명하고 전정재발에 관한 상호불신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북의 노농적위대·붉은청년근위대, 그리고 1·21사태등 무장간첩 남파를 지적했다. 그러자 북의 김영주는 노농적위대와 붉은청년근위대는『일본군국주의를 막기위한 것』이라고 했고 다른 한 대표가 『미제국주의와 일본군국주의 침략에 맞받아 싸우기 위해서』라고 미군을 추가했다.
북의 대표들은 다음날 두번째 회담에서 전날 남이 제시한 문제들에 대한 그들의 다른 설명과 함께 구상을 제시했다.
북측 제안의 중심은 남북교류보다 남북정당회담이었다. 그들은 정당간의 대화·군비축소를 강력히 주장했는데 그런모든 제안을 긴 연설로 제시했다. 결국 두 차례 회담에서도 단 하나의 합의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부장의 평양 일정에선 두번깨 회담이 사실상 마지막 회담이었다. 다음날은 평양을 떠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밀행전에 김일성과 면담할 기회가 주어지리라는 암시가 있었는데도 평양에서의 이틀동안누구도 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마지막날 밤 김일성 면담이 이루어졌다.
그날 두 번째 회담은 예정시간보다 늦게 끝나 저녁식사도 늦어졌다. 이부장은 식사 후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막 잠이들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평양측 대표단의 한사람인 노동당조직부 부부강 유장식의 전화였다. 그는 어디엔가 갈데가 있으니 나오라고 했다.
시계를 보니 0시, 어딜가느냐고 물었으나 가보면 안다고 했다. 경호원을 깨우겠다고 했더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세 사람의 수행원중 한 사람인 정홍진만은 유장식의 부름을 받고 먼저 나와 있었다. 셋이 승용차를 탔다. 그날 따라 소나기로 칠흑의 어둠이었다. 승용차는 큰 길을 버리고 2차선도 안되는 샛길로 접어들었다. 평양에서의 이틀동안 한번도 지나가 본 기억이 없는 낯선 길이었다.
유장식도, 운전사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고 그들 역시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 있어 감히 말을 붙일 수도 없었다고 했다. 이 때문에 내각청사에 닿을 때까지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채 둘은 긴장할대로 긴장했었다고 했다.
한밤중의 면담이 북의 어떤 계산된 의도가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북에서 보면 특별히 이례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김일성은 빨치산 시절부터 습관화되었다해서 한밤중의 집무가 일상적이라는 것이다.
김일성과의 회담엔 정홍진도 동석했으며 김일성도 당조직지도부장 김영주·부수상 박성철·노동당 대남연락부장 김중린, 그리고 유장식과 김덕현을 배석시켰다.
김일성이 앉고 그 옆에 박성철, 그리고 나머지는 뒷면 벽쪽에 늘어 앉았다. 김일성 옆이면 서열로 보나 면담의 성격으로 보나 당연히 김영주여야 할텐데 박성철이어서 이상하다 했는데 끝날 무렵에야 카운터파트를 박성철로 교체했기 때문임을 알았다.
통일3원칙은 앞서의 대표단회담에서도 다른 여러 문제와 함께 거론되기는 했지만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정리되었다.
이부장이 먼저 자주적 해결을 얘기했고 둘이 함께 전쟁의 불안과 평화를 얘기하는 가운데김일성이 민족단결을 얘기했다.
그 날 김일성은 얘기가 끝날무렵 『세가지 통일원칙으로 단결·평화·외세배격, 여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고 말했다. 이를 자주·평화·민족대단결로 정리한 것은 실무회담에서 였다.
그 날 배석한 대표들은 말을 안했고 김일성이 말을 거의 도맡았다. 김일성은 전날 회담에서 이부장이 제기했던 1·21무장공비침투사건이 「좌경맹동분자의 소행」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내가 뭣 때문에 박대통령을 죽이려 하겠습니까. 나를 죽인다고 공산주의가 없어지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이제는 이부장 동지라해도 괜찮은데 박대통령께서 공산주의 친구 하나 사귀어봐도 좋지 않은가』고도 했다.
김일성은 이부장이 평양을 떠나기 직전 다시 면담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김일성은 수다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다변인 인상을 주었다.
김일성은 특히 미군철수를 겨냥하는 그들의 의도를 간접화법으로 되풀이해 얘기했다. 그러던중 『남조선에서도 남침한다하고 6·25같은 동란을 염려하는데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로 6·25남침을 시인했다.
이부장의 평양 2일의 실질적성과는 김일성과의 두차례 면담에서만 이뤄진 것이 북의 체제를 말해주었다. <이영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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