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딸에겐 무조건 아빠가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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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숨겨진 딸 이야기가 온통 화제다. 물론 왜 이 시점에서 문제가 불거졌나 하는 의혹의 눈초리도 있고, 아무리 공인이라도 사생활은 보호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만의 소리도 있다. 그런가 하면 권력자의 사생활 은폐를 위해 국가기관이 동원된 것이 진짜 문제라는 지적도 적잖다.

사실 유력자의 숨겨진 딸 이야기는 비단 이번만이 아니다. 국내 이야기는 구차하니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봐도 좋겠다. 얼마 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의 숨겨진 딸 마자린 팽조가 아버지와의 감춰진 19년을 책으로 펴내 화제가 된 바 있었다. 올해 서른 살인 마자린이 여섯 살 때 미테랑은 대통령이 되었다. 미테랑은 재임 14년의 대부분을 퇴근 후에는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이 아닌 파리 시내 안에 있던 마자린과 그의 어머니 안 팽조의 아파트에서 지냈다고 한다.

마자린에 따르면 "아침식사 후 박물관 큐레이터였던 엄마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면 대통령이었던 아빠는 승용차로 엘리제궁으로 향했고 나는 학교로 갔다"고 할 정도였다. 이런 점에서 미테랑은 정말이지 간 큰 남자였고 결코 잘 했다고 칭찬받을 일은 못 되지만 그래도 인간적 매력이 느껴지는 사내였다. 비록 남 앞에 떳떳이 내놓지는 못했지만 그 숨겨진 딸에게 아빠 노릇을 하려고 애썼으니 말이다.

19년 동안 숨겨졌던 딸 마자린은 1996년 암으로 세상을 떠난 미테랑의 장례식에서야 비로소 공개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마자린은 그전까지 미테랑이 자기 아버지라는 사실을 함구해야 했다. 그래서 마자린이 최근 펴낸 책 이름도 '함구(Bouche Cousue)'였다. 당연히 어린 마자린이 겪어야 했던 심적 고통 또한 적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거리로 나오거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을 때 아버지는 행복해 했지만 나는 극도로 공포스러웠다"고 말할 만큼 말이다.

하지만 비록 남의 눈을 피한 채이긴 했어도 아버지의 입맞춤과 따스한 눈빛,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 손길을 느끼며 자란 마자린은 아버지 미테랑이 죽은 뒤 '프랑수아 미테랑의 친구들'이란 단체를 조직해 이끌면서 미테랑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에게 부탁한 대로 그의 정치적 유산을 지키는 일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안타깝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구석이 있는 아버지와 딸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솔직히 나는 김 전 대통령의 숨겨진 딸 이야기를 전해들으며 그 사실 여부를 떠나 다른 무엇보다 이번 일을 통해 새삼 나 자신, 아빠와 딸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 역시 딸을 키운다. 다행히 공개리에 키운다. 하지만 정작 내가 얼마나 딸에게 아빠 노릇을 제대로 했는지, 혹 숨겨진 딸만도 못하게 하진 않았나 하는 반성을 했다.

그래서 언젠가 읽었던 그레고리 랭이 쓴 '딸에게 아빠가 필요한 100가지 이유'란 책을 다시 꺼내 보았다. 거기엔 내 마음을 후벼파듯 새겨진 한 대목이 있었다. "딸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하던 일도 멈추는,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가르쳐주는 그런 아빠가 필요하다."

과연 나는 내 딸의 모습을 보기 위해 내가 하던 일을 멈춰본 적이 있던가. 항상 이것만 끝내면 보리라며 딸의 소중한 순간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진 않았던가. 그래서 그 아이로 하여금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느끼게해 줄 기회를 너무 많이 놓치진 않았던가. 비록 내 딸을 감추진 않았지만 결국 그 아이로부터 나 스스로 그 잘난 일들을 핑계로 숨어버린 것은 아니었던가.

나는 누군가의 숨겨진 딸에 대해선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도 비난할 생각이 없다. 그저 그 안타까운 개인사를 반면교사 삼아 오히려 숨겨지지 않은 딸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눈빛 맞추지 못하고 더 많이 입 맞추지 못한 스스로를 돌아볼 뿐이다. 그렇다. 딸에겐 무조건 아빠가 필요하다. 그러니 지금 하던 일을 멈추고 딸을 보자. 가까이 있거든 입 맞추고 안아주며, 멀리 있거든 전화라도 걸고, 문자라도 날리자. 그리고 그 딸에게 단 한번만이라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주 같은 아빠가 되어 보자. 단 한번 만이라도!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