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스님의 지팡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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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순절에 기체만강하시고' 편지를 쓰던 백로(白露)입니다. 포도가 제철인 백로에 비가 내리면 오곡이 겉여물고 백과에 단물이 빠진다고 했습니다. 자주 흐린 하늘을 보며 앞집 할머니도 한숨을 내쉽니다. 풀잎 이슬도 속눈썹에 맺히면 눈물이 되지요

가을 아침에 문득 생각합니다. 한 마리 개미가 하루 종일 걸은 만큼 저의 다리로 걷는 사람은 몇이나 될지, 벌 나비가 수많은 꽃을 찾아다니는 만큼 열렬히 사람들을 만난 이는 또 몇이나 될지,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나부낀 만큼 마음 아프게 흔들려본 이는 또 몇이나 될지. 도대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회와 반성은 쓰디쓰지만 이 계절에 꼭 복용해야할 상비약입니다.

수경 스님이 집에 들렀습니다. 순천 성가롤로 병원에서 절뚝절뚝, 지팡이 짚고 왔지요. 삼보일배 참회의 길을 가며 반생명 반평화의 세상에 묵언의 화두를 던졌습니다. 그 길에 한쪽 다리를 바쳤지만 아직 흐린 새만금 갯벌과 북한산. 앞집 할머니처럼 한숨을 쉽니다. 스님의 지팡이는 이제 생명 평화의 죽비가 되었습니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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