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약값 OECD의 44% … 미, 자국산 약값 올리기 압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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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미국은 자동차를 얻고, 한국은 농업과 철강을 지킨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에서 글로벌 신약 약가에 대한 합의가 포함됐다. 지난 26일 산업통상자원부는 “글로벌 혁신 신약 약가 제도(한국의 수입 신약 가격 책정 제도)를 한·미 FTA에 합치되도록 제도를 보완하는 안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아직 구체적인 수치나 방안이 드러난 것은 없지만 제도가 바뀔 경우 국내 의약 산업에도 적지 않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한·미 FTA 합의 새로운 문제 #미, 자국 내 판매가보다 낮다고 불만 #한국서 임상시험 땐 값 우대도 지적 #미 측 요구 들어주면 건보에 부담 #한국 제약사 신약 경쟁력 약해 불리

한국제약바이오협회의 ‘2017 제약산업 통계정보’에 따르면 한국 제약사들의 지난해 미국 수출액은 1억1628만 달러(약 1260억원)로, 전체 수출액의 3.7%에 불과하다. 미국의 무역 적자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문제 삼는 배경에는 한국의 약가 정책을 ‘눈엣가시’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건강보험공단은 주요 7개국(G7) 국가 약값의 가중평균을 따져서 가장 낮은 가격으로 국내 약가를 정한다. 국내에 출시되는 신약의 다양성을 제한하면서 건보 재정의 건전성에 초점을 맞춘 전략이다. 한국에서 내놓는 신약의 약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가의 44% 수준이다. 글로벌 제약회사 입장에서는 신약의 혁신성을 인정받기 가장 어렵고, 매출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늘어나면 사용량 약가 협상을 통해 가격을 10% 인하해야 한다. 게다가 복제약으로 통하는 제네릭이 출시되면 신약의 가격이 반토막난다. 한국의 약가 정책이 보수적인 시장으로 알려지면서 글로벌 제약사들은 한국보다 중국에 먼저 신약을 출시하는 게 관행처럼 굳어졌다. 한국에서 싼값으로 먼저 출시한 뒤 더 큰 시장인 중국으로 옮겨가면 한국 약값이 참고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약에 대한 인색한 약가 정책은 국내 제약사이든, 해외 제약사이든 마찬가지다. 대신 국내 신약개발을 장려하기 위해 ‘혁신형 제약기업’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요건을 갖추면 약가를 10% 올려주는 등 혜택을 주고 있는데, 외국 제약사들이 부러워할 만한 수준과 거리가 멀다.

미국 제약협회(PhRMA)는 지난 2009년부터 한국 보건당국의 수입 신약 가격 책정 제도를 문제 삼아 왔다. 한국이 미국 제약회사가 특허를 보유한 신약을 수입할 때 미국 시장 판매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수입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주장이다. 또 한국에서 임상시험을 하는 등 한국 정부가 제시하는 일정 조건을 갖춰야만 약품 가격의 10%를 높여주는 정책도 차별적인 규제라고 지적해 왔다. 미국의 요구에 따라 이런 부분을 수정한다면 건강보험 재정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미국이 신약 가격에 집착하면서 한·미 FTA 협상에서도 이를 빼놓지 않은 것은 요즘 신약을 개발하는 미국 제약기업들의 형편이 극히 좋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의 신약을 개발하는 데에는 독성테스트를 비롯한 동물실험, 이후에 환자의 수를 계속 늘려가는 임상 1∼3상을 거쳐야 판매 허가를 받을 수 있다. 기간도 10년 가까이 걸리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게다가 하나의 신약을 개발하는 비용도 증가하고 있다. 컨설팅기업 딜로이트에 따르면, 2010년에는 12억 달러(1조3000억원)에 달했던 것이 최근에는 20억 달러(21조원) 정도로 크게 늘었다. 임상시험을 둘러싼 안전성에 초점이 맞춰져 규제의 벽이 높게 쌓였기 때문이다.

실제 미국 내에서 연구개발 투자 면에서 12위 내에 속하는 기업들의 매출액 대비 연구 개발비가 2010년 10.1%였는데, 지난해 3.2%까지 떨어졌다. 게다가 이미 웬만한 질병에 대한 치료제는 개발된 상황이고, 어렵게 개발한 맞춤형 치료제의 경우 시장이 너무 작아 경제성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 때문에 FDA는 신약개발 초기 단계에서 최대한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안에 초점을 맞췄다. 특히 지난해 취임한 스콧 고틀립 FDA 국장은 신약개발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신약개발 비용을 절감해주려는 FDA의 노력은 최근 들어 규모가 작은 바이오기업에서 효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셀진과 길리어드, 애브비 등이 지난해 12%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이제 막 빛을 보기 시작한 FDA의 지원 효과가 미국 내 많은 제약기업으로 퍼지게 되면 한국 시장의 문턱을 낮추라는 요구가 본격적으로 들이닥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국내 제약업계는 “한·미 FTA 협상 개정으로 미국 제약업계 요구만 들어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라며 우려하는 분위기다. 미국의 대형 제약사와 걸음마 단계인 국내 제약업체들이 똑같은 입장에서 경쟁해야 할 것을 걱정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 정부가 미국 제약업계 요구를 수용하고, 한국 제약사들의 미국 시장 진출을 확대할 수 있는 협상안을 얻는다 하더라도 국내 제약사들이 당장 얻을 수 있는 실익은 미미하다고 보고 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한국 제약업계의 신약 개발 경쟁력은 미국·유럽 제약사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이기 때문에 미국 시장 진출은 요원한 상황”이라며 “국내 업계에 주는 인센티브가 사라진다면, 국내 제약 산업 경쟁력을 키우기는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뉴욕=심재우 특파원, 김도년 기자 jw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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