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국민에게 꿈을 주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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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현대홈쇼핑이 지난 4일 밤 캐나다 이민상품을 90분간 방송하자 이민상담 신청자가 무려 2천9백55명에 달했다. 신청자 중 20, 30, 40대가 92.1%(20대 10.9%, 30대 49.5%, 40대 31.7%)에 달했다. 지난 8월 28일의 1차방송 때도 9백85명이 몰렸다.

이들 청장년층은 이 나라의 현실에 낙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래에도 희망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이민을 지원했을 것이다. 그들은 현재 및 미래의 이 나라에서 자신과 가족의 자리매김에 회의하기 때문에 낯선 타국에서나마 신고(辛苦)의 새 인생을 개척하는 것이 낫다고 보는 것일 것이다.

현실이 너무 어렵고 메마르다. 청년실업이 급증하자 대학 졸업반 학생들이 졸업을 기피하고 있다. 다음에 졸업한들 취업문이 활짝 열릴 전망은 없다.

서울 강남의 집값은 하루가 다르게 뛰고 있다. 소설보다 더 진기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 사건이 사건을 뒤덮는 형세가 신정부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니까 월드컵 4강 신화의 열광과 환희에 대한 기억이 너무 까마득해지는 것이다. 이 나라가 왜 이렇게 기막히게 돌아가나.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여당이 금년 내내 무얼 했는가를 보면 그 해답의 반은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상식적으로 보면 여당은 새 정부의 출범과 함께 다시 수임한 5년 간의 국정운영을 위해 참신한 정책을 개발.제시.추진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어느 나라 어느 정권이든지 출범 초기는 활력과 의욕, 창의가 샘솟고 웃음이 넘쳐나는 기간이다. 그것이 국민에게 꿈과 기대를 불러일으켜 사회의 안정을 이루는 소금이 된다.

그런 집권당의 모습을 지난 6개월간 본 분이 있는가. 정권 재창출의 집권당이 자기 개혁의 방법론을 놓고 날마다 패거리 싸움으로 일관하다가 그제 급기야 멱살잡이와 욕설의 난장판을 재현한 후 서로 헤어지는 꼴로 마무리를 짓는 형세다. 이러니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길 바란 민초의 꿈은 애시당초 잘못된 것이었다.

여당의 도움을 못 받아서인가. 노무현 정부는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불러 일으키는 데 성공한 것 같지 않다. 국민통합을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할 盧대통령이 분열을 방관.조장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 명시적 현상이 역설적으로 민주당 내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盧대통령은 집권당마저 대선과정의 친노.반노세력의 둘로 쪼개지는 현상을 수수방관하고 있다.

盧대통령은 자기를 적극 도왔거나 지지했던 사람과 세력을 챙기는 데는 열성적이다. 오랜 기간 동고동락했던 인사들에 대한 자상한 배려는 인상적이다.

국빈방문의 출국날 새벽 한 지인에게 보낼 위로서한을 작성하고, 의혹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일시 풀려난 한 측근에게 몇 차례 전화하는 자별한 모습 등은 지지세력에겐 너무 감동적일 것이다.

취임 전 한 친여 신문을 전격 방문한 것이나 친여 인터넷신문과 방송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시한 것도 그렇다. 그는 "아무래도 일하며 검증을 거친 사람이 제일 좋다"는 인사원칙 하에 가신급 또는 인연있는 인물을 구석구석 기용하고 있다.

그래서 다수 국민의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면야 비판하거나 시비 삼을 일이 아니다. 편애는 역대 정권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부패를 잉태하고, 소외를 낳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 정부의 '박지원'과 '권노갑'은 없을까.

소외는 대립의 날을 세운다. 대통령은 비판과 반대를 억울하다고 투정해선 안 된다. 그것을 뛰어넘는 지도력과 꿈을 국민에게 제시.실천해 국민을 하나로 엮어야 한다. 청장년층이 오늘은 괴롭고 험하다 해도 내일에 대한 꿈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1차적 책무는 대통령의 몫이다. 대통령의 꿈이 국민 모두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이수근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