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인 뒤 저지르는 '그루밍 성범죄'…중학생이 가장 많이 당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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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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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자가 당하는 성범죄의 많은 경우는 교회·학교·학원 등에서 이뤄진다고 한다. 가해자는 대부분 '면식범'. 이들은 처음부터 파렴치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피해자를 길들인 뒤돌변하는 그루밍(Grooming) 수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루밍은 성범죄자가 피해자를 성적으로 학대하거나 착취하기 전 공략할 대상의 호감을 얻고, 신뢰를 쌓는 일체의 행위를 지칭한다. 피해자들은 호감을 갖고 있는 대상에게 당하는 성적 범죄이기에 더욱 혼란에 빠진다. 수사와 처벌이 쉽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성관계에 동의한 것처럼 보이는 증거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성범죄에 대한 '미투' 폭로가 사회 곳곳에서 나오면서 진실공방도 뜨거워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그루밍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아동·청소년 성폭력 상담소를 운영하는 탁틴내일은 2014년부터 2017년 6월까지 성폭력 상담 사례, 초등학생 489명과 중학생 60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그루밍 성범죄 관련 설문 조사 결과를 지난해 11월 발표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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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례 분석 결과 그루밍에 의한 성폭력 사례는 43.9%에 이른다. 그루밍 피해 당시 연령은 14~16세가 44.1%로 가장 많았다. 11~13세도 14.7%, 6~10세도 14.7%나 당했다.

성폭력 가해 당시 범죄 구성요건에는 항거곤란·항거불능(23.5%), 폭행·협박(20.6%), 위계(착각·오해하도록 속이고 피해자의 심리 상태 악용 등)나 위력이 17.6%였다.

특히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도 11.8%에 달했다. 탁틴내일 연구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그루밍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범죄 요건으로 정의되지 못한 것'으로 봤다. 피해자는 모두 13~16세였고 가해자는 성인이었기 때문에, 피해자는 '연애하면 다 이런가보다' 하고 가해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발생한 피해였다는 것이다.

김미랑 연구소장은 인정과 사랑의 욕구가 있는 아동은 가해자의 그루밍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렸다는 견해를 내놨다. 그는 "가해자의 그루밍을 받던 아동은 그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종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것이 그루밍의 치명적 위험성"이라고 말했다.

법 집행 과정에서도 그루밍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다 보니 판사들은 피해자 관점이 결여된 상태에서 판결을 내린다. 김재련 변호사(법무법인 온·세상)는 "다수 한국 판결문은 아동 피해자가 '피해를 왜 적극적으로 신고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미 아는 사이인 경우 즉각 고소하기 어렵다는 피해자의 특성과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한 것"라고 했다.

그루밍 피해자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성관계에 동의한 것처럼 보여 수사나 처벌이 어려운 경우도 많다. 이때문에 그루밍 행위 자체를 제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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