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VX 암살처럼···열흘 전 '급습 리허설' 영상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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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VX 살인사건의 공범으로 기소된 도안 티 흐엉 측 변호인이 재판 증거로 제출한 CCTV 영상으로 지난해 2월2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촬영됐다. [WSJ 캡처]

김정남 VX 살인사건의 공범으로 기소된 도안 티 흐엉 측 변호인이 재판 증거로 제출한 CCTV 영상으로 지난해 2월2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촬영됐다. [WSJ 캡처]

북한인들의 지시를 받아 ‘김정남 VX 살인사건’을 실행한 동남아 출신 여성 공범들이 이를 ‘몰래카메라’로 여겼음을 뒷받침하는 폐쇄회로(CC)TV 영상이 공개됐다. 베트남 공항에서 포착된 이 장면에서 베트남 국적 피고인 도안 티 흐엉(30·여)은 김정남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급습’ 동작을 보였다.

베트남 국적 도안 티 흐엉 측 변호인, 증거로 제출 #"몰래카메라인 줄" 또다른 남성에 '장난질' 영상

20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흐엉 측 변호인이 재판 증거로 제출한 이 CCTV 영상은 지난해 2월2일 오후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촬영됐다. 화면 한 구석 흐엉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서성이고 있다가 반대쪽에서 한 남성이 여행가방 카트를 끌고 나오자 그쪽으로 이동한다. 남성이 출구 자동문을 빠져나갈 즈음 여성은 남성의 뒤에서 양손을 덮치듯이 뻗어 남성 얼굴을 문지른 뒤 빠르게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변호인에 따르면 CCTV 속 남성은 베트남 공무원이며 흐엉은 그를 고용한 북한인으로부터 이 남자를 상대로 몰래카메라를 찍는 거라고 들었다. 북한인은 대가로 250달러(약 27만원)를 지불했다. 흐엉은 11일 후인 지난해 2월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했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 북한인들이 흐엉의 손에 발라준 것은 로션이나 오일이 아닌 치명적 화학무기인 VX 신경작용제였단 점이다.

이날 말레이시아 샤알람 고등법원에서 진행된 관련 공판에서 흐엉 측 변호인은 흐엉이 경찰에 체포된 뒤에야 살인에 연루된 사실을 알았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흐엉은 '와이'(Y)란 가명으로 알려진 북한인 용의자 리지현(34)이 2016년 1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자신을 영입했다면서 "그는 거짓말쟁이다. 그는 비디오를 찍는다며 나를 이용했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 공항 CCTV에 찍힌 김정남 피살 장면[사진 후지TV 캡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 공항 CCTV에 찍힌 김정남 피살 장면[사진 후지TV 캡처]

 또 다른 인도네시아 국적 피고인 시티 아이샤(26·여) 역시 의문의 물질이 VX이란 점도, 살인 목적의 행위인 줄 몰랐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범행 직후 빠르게 손을 씻은 이유에 대해 “따로 손을 씻으라는 말을 듣진 않았지만, (범행이) 성공하면 즉각 자리를 피하라는 지시를 받은 데다 기름기와 냄새, 불쾌한 느낌 때문에 스스로 판단해 그렇게 행동했다”고 답했다.

이러한 진술이 사실이라면 북한인 용의자들은 김정남 암살에 동원된 동남아 출신 여성들의 생사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유엔이 대량살상무기(WMD)로 규정한 맹독성 신경작용제인 VX는 피부접촉을 통해서도 중독될 수 있기 때문에 빨리 씻어내지 않을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다. 김정남은 피습 후 고통을 호소하다 약 20분 만에 사망했다.

김정남 살해 혐의를 받는 시티 아이샤(왼쪽)와 도안 티 흐엉. [중앙포토]

김정남 살해 혐의를 받는 시티 아이샤(왼쪽)와 도안 티 흐엉. [중앙포토]

이들에게 VX를 건네 김정남의 얼굴에 바르도록 한 북한인 용의자 4명은 범행 직후 출국해 북한으로 도주했다. 흐엉과 시티는 현지에 남아 있다가 잇따라 체포됐다. 말레이시아 법에 따르면 살해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면 흐엉과 시티는 교수형에 처해질 수 있다. 샤알람 고등법원은 지난해 10월부터 살인 혐의로 기소된 흐엉과 시티에 대한 공판을 진행해 왔으며, 판결은 이르면 올해 상반기 중 내려진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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