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렌즈 갈며 철학했던 「스피노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지금도 그렇지만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자유를 한껏 누릴 수 있는 도시로 널리 알려져 왔다. 특히 16세기 초엽 스페인에서 종교적 박해가 극심했을 때 이곳은 유대인들에게 좋은 피난처가 되기도 했었다.
고독과 수난의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Spinoza)의 조상들도 이때 안식처를 찾아 여기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암스테르담에서 40분 가량 기차로 달리면 레이덴이란 작은 도시가 나오는데 여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스피노자」가 타계하기 전 7년간 살았던 작은 마을 레인스부르크에 도착하게 된다. 이 마을의 스피노자로에 그가 세들어 살고있던 아담한 2층집이 지금도 잘 보관되어 있어 그의 사상과 생애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의 서재에는 펜이며 낡은 책상과 걸상등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이 작은 서재 옆에 딸린 방이 그의 작업실로 이용되었는데 거기에는 피아노 크기만한 렌즈갈이기구가 원형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베틀을 연상시키는 이 이상한 기구를 보는 순간 그에 관한 만감이 교차하여 나는 잠시 깊은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스피노자」는 그의 급진적인 사상 때문에 그 당시 가장 자유롭고 개방적이었다는 암스테르담에서도 매우 위험시되던 인물이었다. 우선 그는 종교적으로 어떠한 형태의 인격신도 부정하는 무신론자였다. 이것은 그가 신을 기하학적 개념으로 해석하여 무한한 실체로 간주했을때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논리적 귀결이었다.
만약 신이 무한한 존재라면 창조주와 피조물이 구별될 수 없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이므로 결국 범신론의 입장이 되며 이러한 입장은 인격적인 유일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종교의 관점에서 볼 때 무신론 외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신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로부터 외면당한 것은 물론 자기 민족의 종교인 유대교에도 「율법서에 기록된 일체의 주문으로」 그를 파문하고 저주하며 추방했던 것이다.
한편 그는 정치적으로도 그 당시의 관점으로는 너무 진보적이고 또 급진적이었다.
「스피노자」는 국가의 궁극적 목적은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생존의 자연적 권리를 잘 유지할 수 있도록 개인을 공포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다.』
그는 이것을 『국가의 목적은 자유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특히 그중에서도 언론의 자유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겼는데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기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범죄시하는 것을 가장 못 견디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국가관이 후에 「루소」(J-J·Rousseau)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고 프랑스혁명에 사상적 지침을 마련한 것은 널릴 알려진 사실이다.
「스피노자」는 자기의 사상이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당시의 사조와 어울리지 않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것을 널리 전파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가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의했을 때도 『국가가 공인하는 종교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철학적 사색의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 제한해야 할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 직책을 거절했다.
그는 민주나 평등, 혹은 해탈이나 구원같은 소중한 가치들도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고까지 마랗 수 있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그 어떠한 직책도 사양했으며, 다만 이 비좁고 어두컴컴한 방에서 렌즈를 갈아 생계를 유지하다가 44세의 젊은 나이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