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이 돈 내며 쓰는 잡지라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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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4호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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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뉴델리에서 열렸던 국제출판협회 세계대회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처음 인사를 나눈 이는 잠나다스 출판사의 다발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구자라트주의 아메다바드에서 1923년에 할아버지가 설립한 출판사를 이어받아 운영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사업을 하던 시대엔 출판인이 존경을 받았는데 지금은 단순한 비즈니스맨으로 취급을 받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갖가지 사연 만난 출판세계대회 #거대 업체들은 비즈니스 강조 #목숨 걸고 책 내야하는 나라도 #출판세상에 어떤 억압도 없어야

 하지만 무대에 올라 연설을 하는 거대 출판사 대표들은 그와는 다른 주문을 했다. “좀 더 비즈니스맨이 되어라.” 이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출판 환경에서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 틀림없었다. 생존을 해야 의미 있는 책도 낼 수 있으니 큰 돈을 번 경험이 있는 출판사 대표들의 조언에 솔깃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냈던 블룸스베리 출판사 회장은 고객은 작가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작가들과 관계가 비즈니스의 핵심이고 독자는 따라온다는 생각으로 들렸다. 학술 자료 서비스로 3조 5000억 원의 매출을 자랑하는 엘서비어 출판사 회장에게 고객은 전문가들이다. 전문가들이 게재료를 내고 출판사가 발행하는 잡지에 싣는다. 돈 받고 실은 자료를 다시 데이터베이스로 묶고 정리해서 전 세계 대학과 도서관에 큰 돈을 받고 팔고 있다. 이제 인도의 농업 생산성 같은 문제에 대해 정부 자문을 할 만큼 사업의 영역이 넓어졌다고 했다. 그는 지적재산권을 무기로 사회와 기술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면서 비즈니스를 해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

 인공지능이 무섭게 발전하고 인공 생명을 만드는가 하면 유전자 조작도 손쉽게 하는 시대에 출판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였다. 하지만, 산업 규모는 크다해도 개별 출판사 규모는 작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적절한 조언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출판사의 저작물에 대한 법적 권리조차 제대로 보장되어 있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지적재산권을 무기 삼아 비즈니스를 해 나가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수조원 대의 매출을 올리는 서구와 일본, 중국의 출판사들 틈바구니에서 콘텐트 기업으로 생존하는 것이 가능한가?

 꼬리를 무는 질문과 궁리를 뒤로하고 비즈니스는커녕 표현의 자유조차 지키기 힘든 나라의 출판인들을 만났다. 매년 출판의 자유를 위해서 헌신한 이들에게 주는 볼테르 상 시상식이 열렸다. 볼테르는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지만, 당신이 그 의견을 이야기 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무릅쓸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 뜻을 기리는 것이다. 지금도 터키에서는 150여 명의 작가와 출판인들이 투옥되어 있다. 작년엔 그들에게 볼테르 상이 돌아갔다. 중국 관료들의 뒷이야기를 홍콩에서 펴냈던 중국계 스웨덴 출판인 귀민하이가 올해의 수상자였다. 그는 2015년에 중국 당국에 의해 억류되었다.

 올해는 특별상이 한 명의 작가와 한 명의 출판인에게 주어졌다. 권력의 탄압 속에 저항하다 사망한 중국의 작가 류사오보와 이슬람 극단주자들에게 살해당한 방글라데시의 출판인 파이잘 디판이다. 디판의 부인 라지아 라만 졸리는 본업이 외과의사이지만 여전히 남편의 뜻을 이어 방글라데시에서 용감하게 출판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남편이 차던 시계를 통해 남편의 맥박을 느끼면서 슬프지만 힘찬 노래를 했다. 세계 각국에서 온 대표들이 모두 일어서 박수로 존경을 표했다. 그가 출판을 하는 이유가 비즈니스는 아니다.

 출판 생태계 속에는 다양한 이유로 출판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계속적으로 콘텐트를 종이에, 혹은 디지털 미디어에 실어 출판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기획이 시대의 흐름과 들어맞아 큰돈을 번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의 출판사들의 경우 규모는 외국에 비해서 작지만 외국 같으면 거대 출판사나 대학 출판부에서나 시도해봄직한 책들, 즉 비즈니스 보다는 뜻을 살려 출판하는 고집쟁이들도 유독 많다. 산업적으로는 취약하지만, 작지만 색깔이 분명한 출판사들이 많은 우리나라 출판 생태계를 사랑한다. 터져 나오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권력이나 대중의 검열 때문에 억눌리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 출판의 다양한 목소리를 응원하기 위해서 2019년 볼테르 상 시상식은 내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열린다. 출판의 자유를 위해서 희생한 내년의 수상자와 함께 우리나라 출판에 드리워진 모든 억압들이 사라지기를…. 천만금을 얻어도 자유를 잃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일우
과학잡지‘에피’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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