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한나라당의 자승자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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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나라당의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 결의 강행을 보면서 이래도 되나 하는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막강한 국회 다수표를 조자룡 헌칼 쓰듯 이런 명분 약한 일에 쏟아 붓고 정작 나라경제와 정치개혁이라는 큰일에는 힘을 못 쓰는 거대 야당에 상당수 국민은 허탈해 할 것이다.

*** 명분.실익없는 해임안 강행

정치는 명분 싸움이다. 한나라당은 해임안 강행에서 스스로 명분을 잃고 있다. 당초 金장관 해임안 발동은 한총련의 의정부 미군기지 난입사건에 대한 책임추궁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행정상 책임이 행자부 장관에게 있다 해도 경찰청장도 아닌 행자부 장관 해임을 국회결의로 할 수 있느냐에 대해 한나라당 내에서도 수긍하지 못하는 명분적 약점을 지니고 있다. 진정으로 한.미관계 악화를 우려하고 재발방지를 위해서 야당이 했어야 할 일은 당시 즉각적으로 경찰청장 해임을 강하게 촉구하고 나섰어야 했다.

해당 지역 경찰서장 한 사람도 문책 못한 채 지금 와서 행자부 장관 해임을 요구하니 국민이 납득 못하고 당 내부 의원들마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 것이다. 가뜩이나 약한 명분에다 느닷없이 盧대통령 중간평가라고 내세우며 당내 이반세력을 결집하러 나섰으니 스스로 명분 없는 정치공세임을 자인한 꼴이다.

정치란 현실이다. 명분이 없다면 현실적 이익은 있는가. 물갈이 파동으로 어수선한 한나라당 내부 결속이라는 이익은 있을지 모르지만 구태 야당은 어쩔 수 없다는 반(反) 한나라당 정서를 결집시키면서 정국을 조기 총선체제로 몰아가는 부작용도 각오해야 한다.

한국 정치란 상대의 약점을 밟고 일어서는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20%대다. 저질 파당싸움을 벌이는 민주당의 지지율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졸수는 골수 지지파끼리의 자위는 될지 몰라도 다수 방관세력의 유보한 기대마저 허무는 악재가 될 것이다.

유권자 전체의 30% 미만이 50대 이상이다. 5060을 주축으로 한 한나라당이 지지세력 확장보다는 스스로 오그라드는 자승자박의 자충수를 던진 셈이다. 명분없는 해임결의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국민을 볼모로 한 총선 패거리 싸움은 이념 간.세대 간.지역 간 분열로 맞서 나라 경제는 도탄에 빠질 게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런 명분없는 한나라당의 해임결의라 해서 盧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도 좋은가. 국회의 장관 해임결의를 놓고 헌법 해석이 엇갈린다 해도 국회 결의는 민의 대변이라는 측면에서 대통령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무게를 담고 있다.

헌정 이래 다섯번째 해임건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해임결의의 명분과 정당성 여부도 제각각이지만 중요한 것은 아직껏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만 2년 전 국회가 DJ정부의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결의를 하자 DJ는 며칠 후 林장관을 대통령특보로 발령내면서 간접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러자 자민련이 반발하고 DJP공조가 깨지면서 정국은 급전직하 레임덕 상황으로 몰려갔다.

*** 졸수 맞대응보단 한발 물러서라

아무리 한국정치가 엉망이라 해도 국회를 모독했을 경우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민의에 대한 도전이고 국회 경시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정당성 없는 해임결의 거부가 어떻게 민의에 대한 도전이고 국회 경시냐 하겠지만 거부권 행사는 명분 약한 해임안 결의와는 별도로 국회 경시의 반민주적 행위로 기록될 것이다. 야당의 자충수로 획득된 정치적 고지를 스스로 허무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악수(惡手)에 대한 악수 대결은 총선을 앞둔 대통령 중간평가로 정치상황은 급속히 악화될 것이다. 어느 당이 이기고 지든 총선이 대통령 중간평가로 조기에 좁혀질 때 한국정치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말려들 게 분명하다.

이래도 될 것인가. 지금 1년은 향후 한국의 장래 10년을 담보할 중차대한 시기다. 대통령은 총선 아닌 국정에 전념해야 할 때다. 국정전념을 위해서도 거부권 행사는 자제돼야 한다. 졸수에 졸수 응대보다는 한발 물러선, 한 단계 높은 응수를 할 때 새 대통령의 새로운 면모를 과시할 수 있을 것이다.

권영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