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과시기 다소 늦춘 것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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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워싱턴=한남규 특파원】3년간의 준비작업과 진통 끝에 마련된 미 의회의 종합무역법안이 최소한 올해 안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햇빛을 보기 어렵게됐다.
민주당이 다수의석을 점하고 있는 의회는 예상돼온 「레이건」 행정부의 거부권행사에 즉각 반발, 하원은 거부권 결정이 발표되자마자 곧 거부권번복(오버라이드)을 의결했다. 지난4월21일 법안을 통과시켰을 때처럼 이번도 압도적인 표차를 과시했다.
상원도 일단 내달 중 번복의결을 시도할 것이다. 한달 전 상원이 법안을 처리할 때 공화당의원도 11명이나 가세, 통과시켰다. 그러나 상원은 「고르바초프」와 미·소 정상회담을 갖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나는「레이건」 대통령의 입장을 우습게 보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배려로 그의 귀국 후에 처리하겠다는 태도다.
실제로 의결에 부쳐지더라도 상원공화당의원들의 공화당패배로 해석될 정도로 까지 민주당 측에 가세할 것 같지 않다.
「레이건」대통령의 거부권행사 하루전 미 전국제조업자 연맹은 문제의 공장폐쇄조항만을 뺀 나머지 내용을 가지고 통상법안을 부활시키자고 요구했다.
백악관이 바라는 것도 똑같다. 통상법안 내용이 전반적으로 보호주의 색채가 뚜렷한 게 특징이지만 특히 「레이건」 대통령이 가장 강력하게 반대해온 조항은 1백명 이상의 종업원을 거느린 기업이 해고 또는 공장폐쇄시 60일 전에 이를 사전 통고해야한다는 내용이다.
설사 이 조항만을 삭제, 나머지를 살리자는 합의가 의회·행정부간에 이루어진다 해도 기술적으로 의사처리 일정이 너무나 빡빡하다.
중단거리 핵무기철거협정(INF)비준, 미·캐나다 자유무역협정비준, 섬유쿼터법안, 예산안 등 처리해야 할 안건이 산적해 있다. 그러나 올11월 대통령·의원선거 때문에 10월초면 사실상 회기가 종료된다. 여름휴가기간까지 생각하면 더 이상무역법안에 소비할 시간이 없다.
더구나 민주당은 내심 「레이건」의 거부권행사를 즐기는 면도 없지 않다. 공장폐쇄 사전통고에 대한 「레이건」행정부의 반대입장을 선거이슈로 활용할 속셈이다.
민주당은 미 유권자의 8할 이상이 사전통고제도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공화당은 종업원보다 경영자 쪽을 옹호, 기업의 이사회와 다를 게 없다고 몰아 붙이겠다는 것이 민주당의 전략이다.
민주당은 또 최근 여론조사결과 「듀커키스」후보가 공화당후보 「부시」부통령을 크게 앞지르고 있어서 민주당이 승리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통상법안의 확정을 내년까지 연기하는 것도 괜찮다는 여유마저 갖고 있다.
통상법안에 대한 「레이건」 행정부의 불만은 공장폐쇄조항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외국의 불공정 무역관행 여부를 판단하는 권한을 대통령으로부터 무역대표부(USTR)로 이관하는 내용이 대통령권한을 축소하는 것으로 반발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공화당 쪽도 통상법안에 담겨있는 보호주의적 내용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겠다는 입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신흥공업국을 개방하고 있는 슈퍼301조(불공정 무역관행 보복) 지적소유권보호조항, 환율협상강화 등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는 이 법안의 부활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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