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긴꼬리제비나비의 방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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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긴꼬리제비나비가 섬진강 변 우리 집에 왔습니다. 나를 찾아온 게 아니라 돌담 아래의 방아풀 꽃을 찾아 먼길을 달려왔습니다. 연보랏빛 꽃들은 시방 일곱 마리 나비들의 군무 속에서 신이 났지요. 이른 아침부터 앞마당은 온통 잔칫집 분위기입니다.

방아풀에 오줌이나 내깔기다 긴꼬리제비나비가 온 뒤부터 오줌은 오줌통에만 눕니다. 내가 해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어슬렁거리며 꽃과 나비의 대화를 엿들을 뿐. "네가 아니면 내가 여기까지 왔겠니?" "나도 이미 오래 전부터 네가 날아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어" "그래 그래, 너 없이는 나도 없어"

툇마루에 앉아 나의 꽃 시절을 생각합니다. 불우했으나 나비의 꿈이 있었지요. 그러나 요즘 20대의 절반 이상이 이민을 꿈꾼다고 합니다. 인터넷 자살동호회에서 만난 절망의 꽃들이 여관방에서 죽어갑니다. 슬프고도 무서운 일이지요. 절망은 언제나 절망하는 자에게만 오는 법. 실은 그들의 머리 위에도 나풀나풀 나비들이 맴돌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지요.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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