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과 자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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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스스로 자기 목을 베었다가 도로 살아나게 된 한 남자가 교수형에 처해졌소. 자살의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해진거요』
1901년에 러시아인 망명객 「니클라스·오가레프」가 정부 「메리·서덜랜드」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당시 런던에서 자살은 살인과 같은 범죄로 취급됐다. 그 때문에 불쌍한 자살 미수자는 무시무시한 징벌을 받았다.
그 편지에서 「오가레프」는 『이 무슨 놈의 미치광이 사회이며, 어리석은 문명이란 말인가』하고 개탄했다.
영국의 자살혐오 풍습은 다분히 기독교 전통의 견습이다.
하지만 실은 성서에 자살을 금한 표현은 없다. 구약에는 자살한 「삼손」, 「사울」, 「아비멜렉」, 「아히도벨」등 네 명에 대해 불리한 설명이 없다. 신약도「유다」의 자살조차 무미건조하게 기록했을 뿐이다.
자살을 죄악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6세기 이후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도덕론이 근거가 되었다. 인간의 생명은 영원하므로 소중한 것이다. 신을 죽일 수 없듯이 인간을 죽일 수 있는가 하는 정신이다.
생명을 외경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동양의 전통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교에선 진리에 충실하기 위해 몸을 버리고(사신) 유교에선 인의를 지키기 위해 몸을 죽이는 살신성인을 인정한다.
유교의 경전인 「논어」에는 「지사와 인인은 살기 위해 인을 해치지 않는다」고 밝힌다.
고대 한국인의 자살을 연구한 한 보고에 보더라도 우리 선인들이 다분히 유교적 자살관에 살았음을 느끼게 한다.
자살자 11명 중 가장 많은 5명이 「적이나 반대 세력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절박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자살을 택했다.
절박한 상황에 대한 대처로 자살을 선택한 심정을 이해함직 하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자살자가 나타나고 있다. 시국에 대한 울분으로 투신·분신 하는 젊은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대학 도서관에선 개인문제로 고민하던 학생들이 잇달아 자살하고 있다.
정말 절박한 상황도 아닌데 환상적 현실감에 사로잡혀 하나뿐인 꽃다운 젊은 생명을 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안타깝기 한량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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