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에 시달리며 8년 세월"|당시 여고1년생의 「5·18 그날」회상|진압군, 시위대등 18명 탄 버스에 사격|"응사·투강…대부분이 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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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당 탕 타다탕』. 귀청을 찢는 총성, 그리고 비명, 비명-.
80년5월23일 한낮, 광주근교화순 너릿재터널 부근 으슥한 산길은 광주사태의 또 하나의 처절한 장(場)으로 얼룩졌다. 『그때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그 동안 긴 세월을 몸부림쳤다해도 결코 과장은 아닙니다. 너무나 참혹했고 처절했기에….』
홍금숙양(25, 5·18광주민중혁명부상자동지회여성부장), 『살려달라는 애원은 M16 총성속에 자지러들고 피와 살이 튀는 살상의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그녀는 『8년의 세월도 그 악몽같은 기억을 지우지는 못했다』고 한숨 지었다.
홍양은 당시 광주 춘태여고(현 전남여상) 1년의 열일 곱살 소녀.
광주가 온통 총성과 함성에 휩싸여 항쟁의 도시로 변한 절박한 와중, 그녀는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살상의 길로 달리는 운명의 차를 탔다.
어머니와 함께 당시 전남대와 고등학교에 다니던 두 오빠(현재 34세와 29세)를 찾아 나섰던 홍양은 어머니와도 헤어져 배회하다 살벌한 시내상황에 질려 집(광주시주월동)으로 가던 중 광주공원부근에서 시위대가 몰고 다니던 25인승 미니버스에 편승하게 됐다는 것.
홍양은 집으로 태워다줄 것을 부탁했지만 미니버스는 걷잡을 수없는 최악의 상황에 빠져든 광주를 벗어나려 한 듯 나주쪽으로 나가는 월산동으로 달리다 화순쪽으로 방향을 바꿨다는 것.
미니버스에 탄 인원은 M1등 총기를 가진 시위대등 모두 18명이라 했다.
5월의 쾌청한 한낮, 한적한 산길을 달리던 미니버스가 광주와 화순경계 너릿재터널앞 1km정도 지점에 이르렀을 때 참극은 벌어졌다.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였습니다. 길 왼쪽 숲속에 대기해있던 진압부대원들이 먼저 위협사격을 해왔어요. 시위대와 군인사이에 총격전이 잠시 있은 뒤 차가 멎고 시위대들이 두손을 들었으나 집중사격이 멎지않았어요.』
『본능적으로 의자밑에 엎드렸죠. 살려달라는 애원·비명,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총소리가 멎고 군인들이 차안으로 올라와 시체들을 발로 뒤척이며 확인을 하더군요. 저와 남자 2명이 살아있었습니다.』
홍양과 중상을 입은 2명의 남자는 얼마후 달려온 구급차에 의해 간단한 치료를 받은 후 진압부대원들의 감시하에 경운기에 실려 산 속으로 옮겨졌다는 것.
『살려달라는 남자2명을 어디론가 손수레에 싣고가고 나는 헬리콥터편으로 당시 송정리군부대로 데려갔습니다.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져 독방에 갇힌 채 조사를 받아오다 1백여일만에 풀려났습니다.』
홍양은 자신외에 미니버스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죽은 게 틀림없다』고 말하며 그날의 참상에 대한 자신의 증언은 『전혀 꾸밈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극적으로 살아난 홍양은 온몸에 파편상을 입어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광주적십자병원과 전남대병원등을 전전하며 수술을 받는 등 병원신세를 져야했으나 오른손 손가락 3개가 구부러지지 않는 불구가 됐으며 발가락등에 아직도 파편이 박혀있는 상태로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했다.
부모의 직업과 나이등 가정환경을 밝히는 것은 물론 자신의 정면얼굴 사진조차도 촬영을 거부해온 홍양은 4남4녀중 세째딸.
『여고시절 간호장교가 꿈이었다』는 홍양. 『그러나 누가 이 지경이 된 나를 데려가겠느냐』면서 결혼조차 포기했다며 눈시울을 붉히는 그녀는 『다시는 광주사태와 같은 민족적 비극을 막기 위해서도 철저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응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광주=임광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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