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벤처 기술 탈취 막는 ‘기술임치제’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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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액정표시장치(LCD) 관련 기술을 자체적으로 개발한 경북의 중소기업 A사는 경쟁업체에서 해당 기술을 베끼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A사는 향후 법적 분쟁 시 기술을 먼저 개발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기술임치제’를 이용했다. 경쟁사는 이 소식을 접하고 해당 기술 개발을 포기했다.

핵심기술 정부에 보관해 유출 방지 #4만8300여건 보호 … 활용 더 늘 듯 #분쟁 발생시 소유권 법적 보호 받아 #홍종학 장관 취임 1호 정책으로 주목

중소벤처기업부가 22일 소개한 ‘기술임치제’의 활용 사례다. 기술임치제는 기업의 기술 관련 자료를 신뢰성 있는 전문기관에 보관해 기술유출을 방지해주는 제도다.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탈취, 경쟁사의 기술도용 등을 막기 위해 2008년 도입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간 홍보 미비 등으로 덜 알려졌지만, 홍종학 중기부 장관이 기술탈취 근절을 언급하며 취임 1호 정책으로 기술임치제 활성화를 밀어붙이면서 관심이 부쩍 커지고 있다. 이 제도는 핵심 기술을 가진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효과가 쏠쏠하다. 그간의 기술유출 피해 사례를 보면 상대 기업이 거래상 우월한 위치에 있는 기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법적 대응 여력이 낮고, 향후 거래 시 보복이 두렵다 보니 중소기업은 피해를 감내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기술을 임치한 기업은 이런 상황에서 원천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기술임치계약 체결 시점에 해당 기술·자료에 대한 법적 효과가 발생해 차후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소유권에 대해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기술임치제를 도입한 미국·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기술 보호 안전장치로 보편화했다.

또 다른 효과도 있다. 특허 출원을 하면 열람·복제가 가능해 기술이 공개되지만, 기술임치제는 전혀 공개되지 않는다. 외부로 알리지 않고, 비밀을 유지하고 싶은 기술도 보호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대기업 입장에서도 중소기업 기술을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대기업은 하도급이나 위탁 중소기업이 폐업하면 그간 받던 기술이나 서비스의 유지·보수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임치된 기술은 일정 절차를 거쳐 기술·서비스를 다시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2008년 도입 이후 지난해 연말까지 임치된 기술은 4만8300건 정도에 불과하다. 국내 중소기업 수가 300만 곳에 달하고, 새로운 기술이 쏟아지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아직 이용은 미진한 편이다.

배경에는 우선 중소기업 스스로 기술 보호에 대한 경각심이 높지 않다는 점이 꼽힌다. 거래 기업 눈치를 봐야 하는 중소기업 현실상 이용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정부가 제도 확산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활용을 늘리기 위해 중기부는 창업·벤처기업 등의 사용료를 신규 가입 시 연 30만원에서 20만원으로, 갱신의 경우 15만원에서 10만원으로 내리기로 했다. 또 기술 유출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21개 업종의 표준하도급 계약서에 제도 활용 규정을 넣기로 했다.

중기부 백운만 대변인은 “생산·제조법, 설계도, 연구개발 데이터 같은 기술 자료뿐만 아니라 재무·회계·인사·마케팅 등 기업의 운영 관련 자료, 원가·거래처 등 매출 관련 경영 정보도 임치할 수 있다”며 “정부의 지원 강화와 기업의 제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최근 들어 이용 실적이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라고 전했다.

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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