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전방위로 번지는 문화계 미투, 그 절박함에 귀 기울여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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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성폭력 피해를 고백하는 미투(#MeToo) 운동의 바람이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노벨상 후보로 거론돼 온 원로시인, 연극계의 대부 이윤택 연출가 등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줄줄이 성폭력 가해자로 밝혀지는 상황이 충격적이다. 20일에도 또 다른 연극 연출가, 뮤지컬계 유명 음악감독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 폭로가 나왔다. 업계에는 “떨고 있는 남성 예술가들이 한둘이 아니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 마치 문화예술계가 성범죄의 늪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문화예술계는 곪을 대로 곪았던 문제가 터졌다고 보고 있다. 그간 문화예술계의 남성 중심적인 문화, 연출자·감독에게 집중된 절대 권력, 특유의 도제 시스템 등이 이유로 꼽힌다. 예술이란 이름으로 온갖 기행을 관용해 온 분위기도 있다. 이윤택 연출가 역시 공개 사과 석상에서 “18년간 관습처럼 해왔다”고 했다가 더 큰 반발을 샀다.

성폭행 폭로도 나온 이씨에 대해서는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진상조사와 처벌을 요구하는 글이 잇따르고 있다. 여성연극협회가 ‘법적 조치’를 촉구한 데 이어 피해자들도 이씨에 대한 고소를 준비 중이다.

한편 문화체육관광부는 실태조사 등 대책 마련에 착수하겠다고 20일 밝혔다. 지난 2015~2016년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문화계 성폭력 릴레이 폭로 때도 실태조사, 관련 입법 등을 약속했다가 유야무야했던 전철을 밟아서는 곤란하다. 여성가족부 역시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번 사태는 블랙리스트 파문 못지않게 우리 문화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심각한 사태다.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철저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 나아가 우리 문화예술계 전반에 양성평등적 문화가 정착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10년도 넘은 뒤늦은 폭로가 아니라 폭로하기까지 10년도 넘게 걸릴 수밖에 없었다는 절박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