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타락 불감증|이수근<정치부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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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8일간의 선거열풍이 끝나고 투표함의 뚜껑 열 일만 남았다.
17년만의 사생결단식 소선거구제 선거 부활이어서 그런지 이번 13대 총선거는 과거 어떤 선거보다 상대후보를 비방하는 모략 흑색선전이 난무했고 대량의 홍보 선전물이 거리와 집집을 뒤덮었는가 하면 탈법·무법의 선거운동이 판을 쳤다.
관광 업·운수업·요식업·인쇄업·광고홍보 업·여론조사기관·제지업·일부 생필품 업 및 소소한 선물 업 등 이 지난 대통령 선거에 이어 좀 과장하면 또 한번「단군 성조이래 최대의 호황」을 만끽했다.
모르긴 몰라도 조폐공사도 새 돈과 수표장을 찍어내느라 연일 철야했을지 모르겠다. 그 모든 선거운동이 돈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데 다 재력가 후보들이 돈 봉투를 대량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안동시의 민정당 권중동 후보측이 25일 2만원씩 든 봉투 4천2백96개를 간 크게 우편으로 보내려다 들통이 나 제명 당할 절차만 기다리고 있다. 이 후보는 한마디로『재수 없이 나만 걸렸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서울의 어느 여당후보는 24일 저녁 달동네에 가구 당 2만원씩 돌렸으나「무사히」넘어갔다.
모든 후보들이 돈을 쓰는「돈 선거」판에 방법이 잘못돼 들통이 났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부정·탈법이 만연하다 보니 선물 수량을 놓고 다투다 한 통장이 변사한 사건도 그냥 묻혀 버리고 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안동시의 돈 봉투 작업에 아르바이트생이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제 모든 국민이 금품제공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생각한다는 말인가.
온 국민이 불법·타락에 불감증이 되어 버린 것인지 모르겠다.
부정과 타락이 어디 후보의 일 만이겠는가 마는 이번만은「돈질」하고「더럽게」타락 선거한 후보를 국민들이 준엄하게 심판해 다음 선거에는 이런 일이 없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어떤 나라든 그 나라 국민수준에 맞는 정치를 갖는다는 말이 있다. 불법·타락을 나무라기 전에 투표하는 순간만이라도 정치의 모습을 한번쯤은 생각해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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